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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술산업 선도한 '술빚는 도시' 인천

재누리 2013. 3. 29. 21:15

 

 


1920년대 양조장 21개… 만주·사할린까지 술 수출
전국소주연합대표 '조일양조'… 국내 최초 실업축구팀 운영, 광복후 국가대표 상당수 배출
'소성주' 인천 옛 지명서 유래, 외국에서도 맛 호평받아

 

한국인의 음주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성별이나 연령에 관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술통에 빠진다.

 인천의 술 제조는 1892년 9월 오카자키라는 일본인이 용강정(현 인현동)에 연 35석(1석은 약 150㎏) 생산 규모의 청주 양조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만든 청주는 주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소비했으나 아무래도 원료와 제품의 질이 떨어져 그들은 자기 나라, 특히 규슈 지방에서 수입된 청주를 더 즐겨 마셨다.

 러·일 간의 제물포 해전 후 인천에 일본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술 소비도 늘어나 1908년에는 양조장이 7개, 생산량은 4만석에 이른다.

일본 술 청주와 달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주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정집이나 술도가에서 소규모로 빚는 정도였다.

 소주가 대량으로 생산된 것은 1919년 도원동에 연 2만석 규모의 시설을 갖춘 남한 최초의 소주공장 조일양조가 생기면서부터다. '

 

금강(金剛)'이란 상표를 달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음행사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 국내는 물론 만주·사할린까지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조일양조가 설립된 이듬해 도요타 주조장, 고삼 주조장 등이 잇따라 생기며 양조업은 인천에서 비중 있는 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 인천의 인구는 3만7000명 정도였는데 한국인 양조장 14개소, 일본인 양조장 7개소 등 무려 21개소의 양조장이 있을 만큼 인천은 '술 빚는 도시'가 되었다.

술 산업을 위해 인천부(현 인천시)도 발 벗고 나선 듯하다. 인천부사(府史)에 의하면 1927년 인천부청 내에 '주류시험실'을 설치해 주질(酒質)을 개량하고 우등주를 제조함으로써 일본 제품의 유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수출에도 이바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해 8월 3일 총독부를 출입하는 신문·통신사 기자단이 인천을 방문했다. 그들은 기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도착해 곧바로 조일양조장을 시찰할 만큼 당시 조일양조의 술 공장은 인천의 주요 산업시설 중의 하나였다.

조일양조는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社)를 맡을 정도로 사세가 커졌다. 사업이 잘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는 축구팀도 창단했다. '인천 조양'이라고 불린 조일양조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막강했다. FA컵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초대 우승과 2회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해방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 소속이었다.

1930년대 조일양조장 모습. /유동현씨 제공

해방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때문에 소주 600석이 차압되었고 미군정이 양조 금지령을 내리는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일양조 도산 이후 1950~1960년대 걸쳐 숭의동에 와룡소주, 신흥동에 럭키위스키 공장 등이 생기면서 인천의 양조업을 근근이 이어갔다.

막걸리(탁주) 양조장은 1938년 대화주조, 1941년 인천양조 등 14개 군소 양조장이 난립했다.

이후 이들 양조장은 연산 5000석 이상 생산기준 법에 의해 5개로 통합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급기야 정부의 1지역 1탁주공장 정책에 의해 1974년 5월 인천지역 11개 탁주양조장이 연합해 인천탁주합동제조를 설립한다.

합동 회사 설립 이후 11개 양조업체 사장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대표직을 맡고 있는데 이 제도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막걸리를 쌀로 만들 수 있는 법이 통과되자 인천탁주는 1990년 1월 11일 전국 최초로 쌀 막걸리 '소성주'를 개발했다. 이 브랜드는 신라 경덕왕 때 붙여진 인천의 옛 지명 소성현(邵城縣)에서 따온 것이다.

소성주는 1993년에 미국 LA와 시카고의 국제식품쇼에 출품돼 호평을 받았으며 1994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음료대회 주류 분야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인천을 대표하는 술로 자리매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