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동
(차이나타운)
월미도가 있는 북성동(北城洞)은 구한말에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한적한 어촌과 산지에 불과한 곳이었다.
1903년 만석동으로 들어갔다가 1912년 일본식 이름으로 화방(花房) 1∼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에 편입됐다.
‘화방’은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花房義質]를 일컫는 말로,
그가 당시에 간신히 서울을 탈출한 뒤 이곳에서 월미도를 거쳐 일본으로 달아난 것을 두고 일본인들이 오만하게 갖다 붙인 이름이었다.
광복 뒤인 1946년에야 이곳은 옛날 북성(北城)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북성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북성 때문에 동네 이름이 생긴 것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인천군(仁川郡)의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인천부 서쪽 19리에 제물량영(濟物梁營)이 있다”,
“제물진은 인천부 서쪽 18리에 있는데 성 주위가 250보”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향토사학자들은 여기서의 제물량, 제물포영, 제물진의 성이 바로 북성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위치는 지금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북성 때문에 지금 월미도 가는 길에 대한제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매립되기 전 북성곶(北城串)이라 불렸고,
그 발음이 변해 ‘북성구지’라고도 했다.
그러나 효종 때 북벌(北伐)정책이 강화되면서 이 성에 주둔했던 군대가 강화도로 옮겨가자 북성은 그 기능을 잃게됐고, 이 일대도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병인양요 이후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비해 북성 주변 바닷가에 북성포대를 세우기도 했지만,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이도 필요가 없게 돼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인천항이 개항한 뒤 외국인들이 이곳으로 많이 몰려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하게 된다. 1977년에는 인근 선린동과 행정동으로 합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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