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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과 연평도

재누리 2009. 3. 25. 18:15

 # 구전설화의 주인공 임경업 장군이 신앙화되기까지

임경업(1594~1646)은 독특한 이력은 지닌 사람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거해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명나라로 망명했다는 부정적인 면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임경업이 “명(明)나라를 돕고 병자(丙子)의 구원을 씻어버리려고” “동분서주하다가 간신의 모해로써 천추(千秋)의 한을 남기고 옥중에서 원사(寃死)한” 것으로 규정한 김태준의 지적(‘조선소설사’)이 여러모로 타당하다. 임경업을 소재로 삼은 소설, 설화, 행장(行狀), 신도비(神道碑) 등을 통해서도 이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종로거리 연초 가게에서 짤막한 야사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을 베던 낫을 들고 앞에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정조실록’ 14년 8월 10일)

 

연초 가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야사를 듣던 자가 갑자기 책을 읽어주는 자를 살해한 이유는 ‘야사’에 등장한 영웅이 간신에 의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됐는데 그가  바로 임경업이었기 때문이다. 야사를 듣던 자가 분별없이 일으킨 사건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지닌 임경업에 대한 존경과 이자점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물론 정조 때에 일어난 일이지만 병자호란으로 겪은 백성의 고통이 여전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숙종대 이후 국가 통합 및 충성심 고양을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임경업이 복권(復權), 찬양(讚揚)되고 있었다.


원통한 죽음과 복권 및 찬양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요건에 해당한다. 최영 장군(1316년~1388년)과 남이 장군(1441∼1468), 그리고 단종(1441~1457) 등이 그들이다. 최영은 고려의 명장이었지만 이성계가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돼 끝내 개경에서 참형을 당했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이었지만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를 도모한다는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의 형을 당했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그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두 실존인물이었으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억울한 죽음이 숭배 대상의 요건인데 일반적으로 죽어서 저승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게 그것이다.

 

 속담에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라는 것도 저승에 가지 못할 만한 이유와 밀접하다. 한(恨)이 남은 상태에서 저승으로 갈 수 없기에 이승의 사람들이 망자를 위해 한풀이의 한 방법으로 굿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원한을 품고 죽은 망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비범한 이력을 지녔을 경우, 단순히 한풀이 굿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소망이 굿의 과정에 개입된다. 망자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산자를 위한 굿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지위는 망자가 돼서도 여전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망자의 원한을 풀면서 산자의 바람을 비는 셈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술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데, 예컨대 능력을 지닌 자들의 물건이나 신체와 접척을 하면 자신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기자(祈子) 주술도 이런 경우다. 다만 죽은 자의 능력 전반에 기대지는 않고 자신과 관련된 특별한 것에만 한정해 이것에 신격화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연평도 본 섬이 이렇게 있으믄 밤이 이렇게 둥글게 돼 있는데, 연평도 요렇게 섬이 하나 떨어져 있어요. 요런 거 같이 뚝을 쌓다구, 요렇게, 예전에 뚝이 없었고 요렇게 사람이 건너 댕기는 덴데 임경업 장군이 지나가다가 식수가 떨어졌다. 그러야. 그래 인제 선원들이
“식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야, 이놈들아, 걱정할 거 없다. 조금 있다 여기서 물을 퍼 실어라.”
그래서 물을 퍼 실었다 그런 얘기야. 퍼 실어 놓고 보니까 물이 하나두 안 짜드라 그런 얘기지.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내 거기 갔을 때 얘기가 뭐냐 하믄은,
“여기 물을 잡숴 보라.”
그런 얘기야. 물이 빠진 다음에 갯가지 그냥 갯벌이 있는 덴데. 돌 몇 개를 이어 놓고는 물을 먹으니깐 단물이거든. 단물이 나온단 말이야. 거기에 그래 인제 그래서 물을 퍼 실었고,
“부식이, 부식이 다 떨어져서 큰일입니다.”
그랬거든,
“야, 이놈들. 걱정할 게 뭐 있냐? 저 산에 가서 보리수나무를 다 꺾어와라.”

   
 


보리수나무라는 게 가시가 이래 있는 게 보리. 그 시골에 불뚝나무라고도 하고 그 가시 돋친 나무 있습니다.

 

그 놈을 갖다가 쭉 꽂아 봤데는 거야. 시방 그 데이보 뚝을 쌓는데 거기다가 쭉 꽂으라고 그랬다는 거야. 응 임경업 장군이 연평요. 가시 있는 거 불뚝나무를 꺾어다 꽂아라 이러니깐 쭉 놨데는거야. 그래 인제 그 사병들이 산에 가서는 그놈 갔다가 쭉 꽂아 놓구선,
“이걸 왜 여기다 꽂으래나?”
꽂아 놓구선 물이 들어갔다. 나간 다음에 보니깐 조기가 다 매달려서 가시에 생선이 주렁주렁 고기가 매달렸으니까,
“그걸 저 실어, 이 놈들아, 여주 반찬하믄 되지 않느냐?”
기랬대는, 그런 전설이 거기 거 연평 가니깐 그 얘길 하더라 그거여(‘한국구비문학대계’)

 

임경업이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병사들의 식수와 반찬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확증할 수 없다. 나무가시를 이용해 조기를 잡았다는 것 또한 일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다만 임경업이 중국을 갈 때 “마포를 출발하여 서해를 통해 바다로 들어갔다(‘인조실록’ 24년 6월 17일)”는 것을 통해 보건대 이즈음은 연평도 부근에 조기어장이 성황을 이룰 때다.


조기 어군의 경우, 1~2월에 제주도 아래 남지나해 쪽에서 겨울을 난 후 흑산도와 홍도 일대에서 첫 어장이 형성되고, 영광 앞바다 안마도 어장을 거쳐 3월 초에는 전라도 부안 앞바다 칠산어장에 이르게 된다. 수온이 상승함에 따라 북상해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 앞바다 죽도와 태안반도 앞 격렬비열도를 잠시 거쳐, 연평도 어장에서 산란을 하고 6월 말경에는 평안도의 철산의 용암포 앞바다까지 이른다고 한다. 임경업이 중국으로 가던 시기와 경로는 조기 어장이 형성되는 시기 및 장소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그렇다고 해서 임경업이 조기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게 아니라 조기는 임경업 이전부터 잡아왔을 터, 마침 우연찮게 그 해에 넉넉한 수확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임경업이 억울하게 죽지 않고 평범한 장수에 불과했다면 신앙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범한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으며 중국으로 가는 항로와 시기가 마침 조기 어군의 형성 시기 및 장소와 유사했다는 데에서, 임경업이 신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경업으로부터 조기와 관련된 신앙이 생성된 게 아니라 임경업의 이전에도 조기와 관련된 신앙 대상이 있었겠지만 임경업을 계기로 그것이 대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임경업 장군이 신앙화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다.


지배층이 숙종대 이후 국가 통합 및 충성심 고양을 위한 방편으로 임경업을 복권, 찬양하기 이전부터 인근 사람들이 그를 신앙화했다는 점이다. 백성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갖는 심리기제를 지니기 마련인데 이를 거친 상태로 드러내지 않고 비범하지만 현실에서 적응하지 못해 억울하게 죽은 특정 지배층을 신앙함으로써 이를 상쇄시킨다는 점이다. 그것도 원한이 깊은 망자일수록 능력 또한 대단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임경업의 신앙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천 근해에 있는 연평도는 조기잡이로 조선에 유명한 곳이며 또한 그 부근 어장 중에 제일 좋은 곳으로 조기잡이 철이 되면 모이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우편물은 1개월에 한 번이나 겨우 두 번 배달을 하여 그곳 주민이 불평이 적지 않은바 이번에 전신국에서는 그 섬 관할인 해주 우편국 임시출장소를 그 섬에 두기로 되어 그저께 7일부터 고기잡이 기간 동안 사무를 취급케 한다고.(‘동아일보’, 1924. 5. 9.)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이지만 우편국에서 임시출장소를 설치할 정도로 연평도에 조기잡이가 대단했다. 바다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궁핍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조기잡이’였을 정도로 조기잡이와 관련한 민속도 연평도 인근지역에 퍼질 수 있었는데, 곶창굿을 비롯해 온갖 풍어제에 임경업 장군이 당신(堂神)으로 자리 잡고 있거나 또는 ‘배치기’의 봉죽에 임경업 장군 깃발을 세우는 일이 모두 이와 밀접하다. 1960년대 전까지 “보릿고개 때도 연평도에서는 개까지 쌀밥을 먹는다”거나 “어부는 조기떼를 따르고, 술집 아가씨는 어부떼를 따랐다”는 말도 연평도와 조기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누대(累代)를 걸쳐 전승된 임경업 장군을 신앙화했던 자들의 옹골진 바람도 한 몫을 했을 터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