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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와 고전소설 속의 강화도

재누리 2009. 3. 25. 18:16

-병인양요와 병자호란의 기형적 대응-

이영태(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BK21 연구교수)

 

2009년 01월 12일 (월) 15:37:06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가사(歌辭)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발생한 시가(詩歌)이다. 4음보 연속체로 된 율문(律文)으로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의 수는 3·4음절이 대부분이고 행수(行數)에는 제한이 없다. 그래서 가사는 율문이되 서정시와는 달리 사물이나 생활에 관한 잡다한 서술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의 가사는 일부 학자층만 창작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영·정조 시기를 거쳐 민간에도 널리 유행해 평민이나 부녀자들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병인양난녹’은 강화도에 살았던 민씨(閔氏) 며느리 경주 김씨가 쓴 가사체의 수기(手記)다. 병인양요가 끝난 후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쟁이 남긴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했기에 국문학은 물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만 하다. 특히 개전(開戰)과 동시에 합리적으로 응전(應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심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지배층들을 통해 조선의 국운(國運)이 다해 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병인양요(1866년)’는 ‘병인사옥(丙寅邪獄)’에 따른 프랑스 군의 보복이었다.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병인사옥’인데 이를 통해 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됐고 그 중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한 선교사와 신도가 지푸(芝 皿아래不)에 있는 프랑스의 아시아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실상을 알리면서 양요가 일어나게 됐다. 10월 14일 갑곶진에 상륙해 16일 강화읍을 점령했다. 이후 11월 10일 물러나기까지 프랑스 군은 약탈 및 방화를 자행했다.

 양난 격근 환시설화를 대강 긔록하려하니 심히 철양한지라. 임진 삼월의 강도 인졍면의 곡지명의 우거하연지 삼십오년의이로되 별 재앙 업사며 존구고 겨압셔 오자니여를 두어 겨압시고 남혼여가의 빈빈이 지내고…천만의의 국운이 불행하야…

‘병인양난녹’의 시작부분이다. 양요를 겪은 이후 주변인들의 증언과 자신이 목도한 것을 토대로 수기형식으로 기록하면서 화자는 매우 처량(심히 철양한지라)하다는 심사를 내비치고 있다. 프랑스 군이 물러난 뒤에 강화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을 직접·간접적으로 경험한 상태에서 기록했기에 심사가 더욱 복잡했을 터이다. 양요에 따른 갑작스런 국운의 불행은 강화도 인정면의 민씨 며느리가 된 지 35년 동안 별 재앙없이 지냈던 것과 크게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가계의 살림이 구차하지 않고 넉넉했으며 주변 친척들과도 자주 왕래하며 지냈기에 양요라는 사건은 일상적인 것들을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조선인들이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부분도 등장한다.

 

   
 
양인이 만리경을 내여 놋코 보며 속인다고 대쇼하고 또 나죵 하난 말은 조션국 물화를 셔로 통하여 강화로 따흘 졍하여 달라하니…(중략)…배 몰골은 상부 갓치 되며 길고 산ㅅ+더[떠]미 갓치 크고 돗대만 둘이 셔고 가온대 글통 잇셔 노질언 하난 일이 업고 굴통의 년긔 피우며 살 가듯 가니…(중략)…복색은 거문 젼 두루마기 입고 무슈이 떼지어 가다 우리 븬집의 드러와 다 둘너보며 갈 때…(중략)…신쳬를 화장하여 궤예 각각 담고 성명을 적금 다 각각 써 붓쳐가지고 십이진 군긔와 도감 군긔 호랑고보하며 강도 재물을 모도 탈츄+ㅣ[취]하여 다 져다 싸핫다가 십월 초오일 졔 배의 싯고 다 도망하여 나가다

서양사람들과 그들이 가져온 서양문물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만리경이나 군인들의 복색, 그리고 커다란 규모의 양선(洋船)과 화장(火葬) 풍속이 그것이다. 서양사람들은 교역 공간으로 강화의 땅을 요구했다는 점과 산더미 같은 배의 규모와 돛대가 둘, 연통이 하나로 노질을 하지 않고도 빠르게 움직인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등사에서 프랑스 군이 대패한 후 전사자들을 화장해 상자에 담아 이름을 써 붙였다는 진술은 조선인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 배 드러오기를 교동 몬져 와 잠간 셧다가 강화로 오니 강화 장계 몬져 오루니 교동수사 밋쳐 장계치 못한 죄로 파직하고 죄즁의 드럿드라. 또 배놈 장단 사는 놈이 양인의 긔믈을 먹고 길을 가르쳐 듸려보낸 죄목으로 대군무법으로 강화셔 죽엿난지라.…양션이 오난대 쳐엄 평안도셔붓터 난을 이루터 올나오니 이날 쵸지와 황뫼 지경의 수슈이 와 셔고…(중략)…강도 군사와 삼영이 아모리할 쥴을 모로더니 이윽고 각고지 가셔 하륙하여 둔츄+ㅣ[취]하고 위풍이 늠늠하며 본관 삼영을 침노하니 당치 못할 쥴을 알고 평복하고 백셩과 갓치 셧기여 동졍을 살피다가 할 일업셔 인을 들니고 통곡하며 빠져 도망하고 삼관이 모도 그리되니 양인이 더욱 긔탄 업산지라

   
 

교동 수사가 장계를 못 올린 죄로 파직 당하고, 장단 출신의 뱃놈이 프랑스 군인들의 길안내를 맡아서 대군문법으로 죽고 초지진과 황뫼 근처에 프랑스 배가 집결했다. 이윽고 양인이 상륙하자 강화 군사들이 군복을 평민의 복색으로 바꿔입고 도망치는 모습이다. 그것도 삼관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이다. ‘삼관’이 아전을 지칭한다 할 때, 양인들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제 살길을 찾고자 허둥대는 모습이야말로 개탄할 만 하다.   

 양인이 녀인은 보난족족 욕을 뵈니 상겨집은 어만지 슈를 모르나 사부(士夫) 황이쳔집 부인과 동리 양반 심션달 부인들이 욕을 보앗다하니 사생이 시각의 달엿시니…(중략)…슬푸다 윤기(倫紀)난 모도 상하고 불측한 백셩들 노략하기를 양인과 갓치 단니더라. 양인이 노략한 짐을 닷난대로 붓잡아 지이면 잘 져다 쥬면 삭젼을 후이 쥬고 상차려 쥬어 포식을 시겨 보내니 삭짐 지기 자원하난 자 무슈하며

강화의 군인마저 본분을 잊은 채 도망가기 바쁠 정도였던 만큼 그에 대한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성들의 피해가 심각했는데 평민은 물론 양반집 부녀자도 예외일 수 없었다. 게다가 양인이 노략질을 한 물품을 옮겨주고 삯을 받으려는 조선인이 무수히 많았다는 진술에 이르러서는 조선 성리학의 근간에 해당하는 윤기(倫紀)조차 무참히 방기되는 상황을 목도할 수 있다.
이처럼 양요에 대응하는 강화도의 모습은 이미 병자호란(1636~1637)의 상황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강화도라는 공간적 배경을 몽유형식에 기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기록으로 ‘강도몽유록’이 있다. 이 고전소설은 17세기 초에 창작된 몽유록계 한문소설이다. 몽유록(夢遊錄)은 글자에 나타난 대로 꿈속의 일을 소재로 해 구성된 작품을 지칭한다. ‘몽유록’은 우리의 한문소설사에서 ‘꿈’이라는 소재가 서사구조의 중심을 이룬다. 대부분의 몽유록은 현실세계의 주인공이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 여러 가지 체험을 한 뒤, 다시 현실 세계로 되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작품 속에 청허선사와 15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병자호란의 책임을 남성들에게 냉엄하게 묻고 있다.

 낭군은 자기 재주에 감당치도 못할 중책을 맡아 오직 천험한 지리만 굳게 믿고 군무를 소홀히 했습니다.…낭군은 군부에 회부되어 도끼로 목이 잘려도 마땅합니다.

시아버님의 죄과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단잠에서 헤어나지 못했지요. 또 매일 크게 취하여 강루에 누워 잠만 잤습니다. 이러니 국가의 존망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원래 제수(制水)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또한 험한 풍랑에 키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적막한 강성(寂寞江城)에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남편이 군무를 소홀히 했으니 ‘도끼로 목이 잘려도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여인이 있다. 삼강오륜이 생활의 기제로 작동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패배에 따른 책임을 남편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이었고 임진년의 전쟁이 7년이었던 것에 비해 병자호란이 두 달 만에 조선의 패배로 끝난 점을 감안하면 전쟁에 참여했던 지배층의 느슨한 정신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여인이 등장해 시아버지의 죄과를 운운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시아버지는 강도유수를 맡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소양이 전혀 없이 음주로 소일하는 자였기에 전쟁이 일어나자 휘하의 병사들이 성(城)을 비우고 흩어졌다고 지적한다. 이 당시 강도유수는 장신(張紳, ?∼1637)이었는데 그는 전세가 불리하자 도망쳐 강도가 함락되게 한 장본인이다. 장신이 강도유수로 부임한 게 인조 14년 1636년 3월 9일이었고 병자호란은 그로부터 9개월 뒤인 12월에 일어났으니 그가 강도유수로서 직책을 온전히 수행했다면 강화도 함락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인조실록’ 1637년 2월 21일)

오랑캐가 등장하자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렸고 강도유수 장신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도망쳤다. 그것도 오랑캐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자들을 막아서면서 도주했던 것이다. 전쟁에 임하는 지배층의 무능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인데 특히 여성들에 대한 성적 수탈이 대표적이었다. ‘강도몽유록’에 등장하는 제4여인, 제12여인, 제13여인 등이 그들이다.
병인양요와 병자호란은 시간적 거리가 있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공간이 강화였던 점은 가사 ‘병인양난녹’과 고전소설 ‘강도몽유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지배층들의 안이한 대처방법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가혹한 피해는 시간적 거리를 넘어 무서울 만큼 일치하고 있었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