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풍경(12)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6)
- 최초의 군함 양무호, 광제호-
1903년 4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효시라 일컫는 양무호(揚武號)가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해군사관학교의 폐쇄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그간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의 침략으로 서양 전함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조선은 신식 배를 만들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술의 미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쓰이물산(三井物産)합명회사가 군함을 납품함으로써 첫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일본 화물선의 크기가 평균 580t이던 시절에 3천여t 짜리 철선이 들어와 위용을 과시하게 됐으니, 고종은 이 군함의 이름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라 명명했다.
# 화물상선이던 양무호 도입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라스(Pallas)호라는 화물상선으로 배의 규모는 3천424t, 1천700마력으로 원양 항로에 취항했는데, 1894년 일본 미쓰이물산이 25만 엔에 구입해 일본~홍콩 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노골화 했던 일본은 조선의 군함 도입을 사사건건 방해하다 석탄 운반용으로 영국으로부터 도입한, 규모가 크고 승무원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운영상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이 노후화된 화물선을 팔기에 이르
▲ 소월미도등대 | ||
그러나 군함 개조공사를 거쳤다고 했지만 청일전쟁에 동원됐다 퇴역한 일본 군함에서 떼어낸 구식 함포 4문을 달아놓은 정도였고, 그나마 인천에 닻을 내린 이후 양무호 구입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일본 군함에 의해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하다가 이 해 8월 22일 시운전을 거쳐 우리 군함으로서 정식 등록했다. 하지만 막상 군함이랍시고 배를 들여놓았지만 이를 운용할 마땅한 인력조차 없었고, 더구나 하루 석탄 43t이라는 막대한 운항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애당초 구입대금을 한꺼번에 지불하지도 못할 만큼 버거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이 배를 사들인 까닭에 대해서는 당초부터 “고종의 국방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풀이하는 반면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기념에 즈음해 공연히 허세를 부린 결과라는 혹평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1903년 6월 1일자 황성신문은 “한 명의 수병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을 사들여 재정을 낭비했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양무호의 초대함장은 박영효의 추천으로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 동경상선학교에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았던 신순성이 맡았으나 배가 워낙 낡은 데다 당초 일본이 운항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군함의 연료인 석탄 대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항구에 정박해 있기 일쑤였다.
▲ 7-역사산책)0922 광제호 | ||
그러다 러일전쟁 시 일본 해군에 강제로 징발당해 첩보함으로 사용됐으며 전쟁 후엔 화물선으로 개조, 2년만인 1905년 7월 인천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운을 맞았다. 러일전쟁의 승전으로 대한제국의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된 일본은 선박대금 잔금에 이자까지 얹어 받아낸 후 양무호를 다시 화물선으로 개조해 대한제국에 넘겨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외교 군사권을 일본에 양도했으므로 이제는 군함이 필요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양무호는 군함의 임무를 펴보지도 못한 채 1907년 부산항에서 선원실습용으로 사용되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상점(原田商會)에 4만2천 원에 매각되고, 1916년 철광석을 적재하고 싱가포르로 운항하던 중 침몰했다.
# 광제호 일본에서 건조
양무호 문제가 비등해져 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새로운 군함 발주 계획에 의거해 일본 가와사키조선 고베조선소(川崎造船 神戶造船所)에 전장 220척(66.7m), 너비 30척, 선심 21척, 화물적재량 540t, 총톤수 1천56t급 광제호(光濟號)를 주문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조(新造) 발주선인 광제호는 해관(海關) 총세무사(總稅務司)였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 한국명 백탁안(柏卓安))의 발의에 따른 것으로, 해관의 관세수입자금으로 건조코자 했고 건조계약 당시의 선주도 대한제국 해관이었다.
광제호는 1904년 6월 15일 진수된 후 자체 시운전을 거쳐 1904년 12월 20일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됐다. 정부는 광제호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 경비함, 등대 순시선 및 세관 감시선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다. 거기에 더해 당시 최신의 조선기술로 제작되고 또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었다. 내부의 무선국 시설에 관한 제원은 알 수 없으나 광제호 외부의 안테나 시설로 보아 1903년 6월경 월미도 등대의 무선통신소가 일본군함과 통신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
▲ 양무호함장 신순성 | ||
주한일본공사는 한국세관에서 연안 순시선으로 신조한 기선 광제호의 선장에 자국인 해군소좌 1명과 기관장 기관사대위 1명을 한국정부에 추천했고, 조선인 항해사로는 유일하게 신순성이 승선했다.
광제호의 도입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육군편제로만 구성돼 있던 15군부를 개편하고 군함 확보에 따른 근대식 해군편제를 마련하는 등 입법조치를 강화했으나, 해관 소속의 기선이었던 만큼 총세무사 브라운이 이 배를 들여와 마치 자기의 개인요트처럼 사용했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인천에 내려와 이 배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뒤 해관의 관리권도 일본인으로 독점됨에 따라 광제호는 해군 군함으로서의 사명은 끝이 났고 사실상 그네들의 ‘관용선’으로 줄곧 차출됐다 한다. 1909년 봄에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이 북간도(北間島)와 울릉도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부산항을 출발해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간 것도, 그리고 그 해 가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에 창춘(長春)으로 급파된 일본인 검사장 나카가와 카즈스케(中川一介)를 태우고 다렌(大連)으로 내달린 것도 모두가 ‘광제호’였던 것이다.
▲ 월미도 무선전신소 | ||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공식적으로 인천항로표지관리소, 즉 예전의 등대국(燈臺局) 소속이었던 광제호는 조선총독부 통신국으로 이관돼 총독부의 관용선이 됐으며, 그 이름마저 광제호가 아니라 ‘광제환(光濟丸, 코사이마루)’으로 바뀌었고, 1912년 조선우식주식회사로 넘어가 상선으로 이용됐으며 인천해원양성소 설립 이후에는 신순성을 교관으로 하는 실습선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석탄운송선으로 전락했다가 광복을 계기로 일본으로 철수해 우리 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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