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풍경(13)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최초 인천최고(7)
- 화교사회의 기원지, 청관(淸館) -
# 조계의 설정과 운영
인천 개항 후 일본과 청(淸) 및 구미 각국은 조계(租界)를 설정해 자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통상을 확대하려 했다. 서구열강과 근대적인 통상조약을 맺고 개항하기 전에도 조선과 중국·일본에는 특정지역에서 특정 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을 허용한 폐쇄적인 교역장이 있었다. 중국의 광동상관(廣東商館),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데시마[出島]의 화란상관(和蘭商館)과 당인옥부(唐人屋敷), 한국 부산의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내지와 격리돼 있었으며 거주와 교역을 허가받은 특정 외국인만이 엄격한 규제 하에서 본국의 특허상인들과 제한된 무역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계제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조계가 세워지면서 외국인 특별상업 허용지역은 자연히 조계에 흡수됐다.
통상적으로 조계는 토지 취득방식에 따라 전관조계(Concession)와 거류지(Settlement)로 구분된다. 또 조계를 관할하는 국가의 수에 따라 한 나라가 독점적으로 조계지를 확보해 운영하는 일국전관조계와 여러 나라가 특정한 지역을 공유하는 각국공동조계로 나눌 수 있다. 전관조계는 일국전관조계를 원칙으로 하는데 필요한 토지를 외국 정부가 한꺼번에 영구히 임대하는 것을 말한다. 토지소유국 정부와 조계설정국 정부 사이에 일정지역에 대한 임대협정을 먼저 맺은 후 설정국의 영사가 그 토지를 자국민에게 분할 대여하는 것이며 설정국 정부는 일정액의 지세를 토지소유국에 납부해야 한다.
▲ 중국인 주택 밀집군 | ||
중국의 경우를 보면 상하이(上海)의 각국공동조계와 프랑스조계가 ‘거류지’ 방식이고 천진조약 이후 천진 등 각지에 설정된 각국의 조계들은 대부분 ‘전관조계’ 방식을 취했다. 한국의 경우는 모든 각국 조계와 청 조계가 ‘거류지’ 방식이었고 인천의 일본 조계도 이 방식을 취했지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 청국거류지 설치
1883년 말(고종 20년) 리나잉(李乃榮)이 영사사무를 관장하면서 인천에 청인들이 내항하기 시작했다.
▲ 공화춘 | ||
전관조계는 해관 서북지역, 오늘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에 위치했으며 면적은 약 5천 평이었다. 장정의 내용은 일본과의 조약과 대동소이하며 조계가 다 찼을 때에는 확장할 수 있도록 하고 청인들이 각국 공동조계 내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됐다. 조계지 내의 토지는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해 바다 쪽으로 근접한 곳을 상등지로 하고 등급에 따라 사정가를 다르게 정한 후 경매법으로 청상인에게 불하해 세를 내고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청상 이주자들이 급증해 애초에 설정된 조계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청은 지계장정의 규정에 따라 한국인이 거주하는 싸리재까지 새로운 조계지를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은 인천지역 청인들의 상권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서 우위를 빼앗기고 패전국민이 된 청거류민은 위축되고 청 조계도 쇠잔해졌다. 전쟁으로 인천을 떠난 청인 가옥을 일본인들이 임대해 거주하게 되면서 청 조계는 점차 잡거지로 돼 갔다. 광무 3년(1899) 9월 11일에 다시 조·청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당잉호[唐榮浩]가 인천영사로 임명돼 오면서 신조계도 자리를 잡게 됐다.
▲ 대불호텔(중화루) | ||
인천항의 청국상인은 초기에는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선박에 식량이나 급수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였다. 갑신정변 이후 숫자가 증가했으나 자본규모는 영세했다. 주요 무역상으로는 동순태(同順泰), 쌍성태(雙盛泰), 서성춘(瑞盛春), 영래성(永來盛), 동흥성(東興盛) 등이 있고, 주요 잡화상으로는 이태호(怡泰號), 덕흥호(德興號), 의생호(義生號), 이생호(怡生號) 등이 있었다. 무역상은 수 명에서 수십 명의 상인자본을 합친 상업조직이었다.
청국상인은 관세를 부담해야 하는 인천항의 무역보다는 평안도, 황해도 연안에서 밀무역을 많이 했다. 인천항 무역의 쇠퇴가 평안도, 황해도에 대한 청국상인의 밀무역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1890년 3월 일본인의 보고에 따르면 청국 산동지방에서 수백 척의 선박이 평안도, 황해도로 밀무역을 하는데 카네킨과 서양물건을 팔고 콩과 잡곡을 가져간다고 했다.
청국상인 가운데는 광동상인 동순태가 가장 유명했다. 동순태는 200만~300만 냥의 대자본을 소유한 대상인이었다. 통리아문은 1892년 동순태에게 한강에서의 기선운항권을 허용하고 세곡운송권까지 부여했다. 이 특권은 동순태가 10만 냥의 차관을 조선정부에 제공한 대가로 얻은 것이고, 조선인과 합자해 설립했다고 하는 통혜공사(通惠公司)의 명의로 획득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기선운항은 원세개(袁世凱)의 지원을 받은 청국의 광동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청일경계계단 부근 모습 | ||
러일전쟁 후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노골화시키면서 청 조계는 다시 변화를 겪게 됐는데, 일본은 청 거류민에 대해서도 명문화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08년(융희 2년) 청은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에게 인천·부산·원산 3항의 청 조계에 관한 협정 체결을 제의했고, 1910년(융희 4년) 3월 11일 일본과 청은 한국에 거주하는 청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부산급원산청국거류지규정(仁川釜山及元山淸國居留地規定)」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강점하자 청국조계는 물론 각국조계의 존폐문제가 제기됐다. 1913년 11월에 조선총독부는 주한청국총영사와 「재조선청국거류지폐지협정」을 체결해 1914년 3월 31일부로 승인을 받고 4월 1일을 기해 부제 실시 공포와 함께 각국공동조계와 청전관조계를 일괄 폐지하고 인천부 관할의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기에 이르렀다.
인천 개항과 함께 시작됐던 인천 청관은 지나정(支那町), 선린동(善隣洞) 시기를 거쳐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에 이르기까지 인천 속 다문화 사회의 한 표징으로 남아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역사적 호불호(好不好)나 가불가(可不可)의 문제를 떠나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인천으로서는 남겨진 역사문화 자원만이라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인천이 갖는 다문화 콘텐츠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 생각된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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