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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출신 이화인(梨花人) 4대 여걸’의 한 사람 김영의

재누리 2009. 3. 25. 18:16

시인이자 인천문인협회 회장인 김윤식 씨가 2007년 6월 4일 ‘다시 인천과 우현(又玄)을 생각해 본다’를 첫 회로 시작해 오늘 48회(김영의 편)까지 인기리에 집필, 연재해온 ‘인천문화예술인考’를 마무리합니다.

김 씨는 이번 연재를 통해 “이 고장의 많은 사람들이 언필칭(言必稱) 문화 예술의 척박함을 탄(嘆)하는데 참으로 잘못된 이야기다. 제 사는 인천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먼 데만 바라보는 소치가 아닐까”라고 지적하고 “굳이 인천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말을 쓰지 않겠다.그 말 자체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그저 내 고장 인천이 낳은 선구적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업적을 살피고 기림으로써 ‘인천의 힘’을 확인해보겠다”고 각오를 밝힌 다음 1년 7개월 동안 향토 문화예술인의 감춰졌던 행적을 찾았습니다.
이를 통해 다방면의 문화예술인도 만나고 인천 문화예술의 지평을 보기도 하고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러 올렸다고 봅니다.
그 동안 열독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김영의(金永義, 1908∼1986)는 인천 출신으로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한 후, 1935년 미국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이수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다. 1945년 동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동교 음악과장이 되었다. 1946년 다시 도미하여 줄리아드 연구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1950년 이화대학교 예술원장으로 복귀했고, 1966년에는 이대 음악대학장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모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화여학당은 쓰개치마를 쓰고 바깥출입도 할 수 없었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세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일깨우면서 100여 년의 역사 속에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특히 초창기에 이 나라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그 업적은 영원히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김활란,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 등의 인물들이 제물포에서 나고 자랐으며 영화의 초창기 여학생들이었음은 이 학교의 큰 자랑이라 할 것이다.”

   
 

이 두 글이 다 『인천시사』에 보이는 김영의에 대한 기록이다. 워낙 이화대학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만 활동했기에 인천에서는 다소 뜨악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분명 자랑스러운 우리 인천 출신의 음악 예술인이다. 특히 인천 인물 김활란(金活蘭), 서은숙(徐恩淑), 김애마(金愛麻)와 마찬가지로 김영의 역시 인천 영화여학당을 나온 뒤, 후일 똑같이 이화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학교 발전을 위해 선도에 섰던 ‘인천 출신 이화인(梨花人) 4대 여걸’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이화대학을 가기까지의 인천에서의 삶이나 기타 관련 흔적을 현재로선 찾을 수 없다. 인천 출신이라고 하지만 인천 어디쯤이었는지도 나타나 있지 않다. 서은숙, 김애마는 당시 부자 동네로 알려진 중구 율목동 출신이고, 김활란은 배다리 출신이지만 김영의는 그조차도 알 수가 없다. 유년시절이나 청소년시절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으로 생각된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것으로 보아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이런 음악적 재능의 확인은 당시의 사회 상황으로는 교회 같은 곳에서나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성립한다면 자연스럽게 개신교 학교인 이화대학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에까지 유학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집안이 매우 풍족하면서 동시에 개명(開明)했으리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아무튼 김영의는 1929년에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1935년까지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다만 우리 『인천시사』의 기록 중 1935년에 줄리아드를 졸업하고 모교로 복귀한다고 한 부분은 착오라는 점이다.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는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라는 단신 기사를 싣고 ‘6월 21일에 송별 음악회가 열린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1935년은 김영의가 미국에서 돌아온 해가 아니라 거꾸로 유학을 떠난 해라는 것이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1931년 6월에 발간된 잡지 『동광』에 홍종인(洪鍾仁)이 쓴 “반도(半島) 악단인 만평”이란 글이다.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한 글인데, 김영의에 대해서는 스테이지 매너에 대해 한마디 평을 하지만 실력은 높게 인정하는 듯이 썼다. 이 무렵 김영의는 도쿄 고등음악원을 졸업한 홍난파(洪蘭坡)와도 연주 활동을 한다.
“그러고 이밖에 가을 악단에 활약할 분을 들면 성악에 안기영(安基永), 현제명(玄濟明) 씨며 여성으로는 최영순(崔永順) 씨며 알토 박경희(朴慶姬) 씨도 성우회에 나온 것을 계기로 앞으로 자주 무대에 나서게 될 줄 안다. 피아노에는 김원복(金元福), 김영의 씨 등의 대소 음악회에 그림자 같이 따라다닐 것이고…….”라고 쓴 1932년 가을 홍종인의 또 다른 음악평에서도 김영의의 활발한 연주, 반주 활동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다가 1935년에 김영의는 도미 유학을 떠나고, 4년 뒤인 1939년에 줄리아드를 졸업한다. 귀국해서는 다시 교편을 잡아 1945년, 서른일곱의 나이로 이화여대 음악과장이 된다. 물론 그 1년 앞선 1944년 3월에는 현제명, 김천하(金天夏), 김생려(金生麗), 김성태(金聖泰) 등과 함께 경성음악연구원(京城音樂硏究院)을 창설하는 등 활발한 음악 활동을 보이기도 한다.
   
 
  ▲ 김영의 1935. 6. 20 도미독주회  
 


이어 1949년에는 채동선(蔡東鮮), 박경호(朴慶浩), 박태준(朴泰俊), 이흥렬(李興烈) 등 14명의 음악인과 함께 문교부 내에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된다. 이후 1955년 한국음악협회 부회장, 195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임되고, 1958년 음악협회 고문, 1966년 이화여대 음대 학장, 1975년 여성단체협의회 부회장, 1977년 이화학당 이사장이 된다. 생전에 문화포장(文化褒章), 대한민국예술원상, 교육특별포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음악사전』 『음악과 음악인』 『이화를 빛낸 음악인들』 등이 있다.
연주자로서의 김영의는 널리 대중적인 인기나 명성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것은 김영의가 이화여대 교수로서 후학 교육과 학교 발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진정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야(視野)로 본다면,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 김영의 1955.6.18. 좌담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