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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하와이, 근대 이민의 시작

재누리 2009. 3. 25. 18:14

# 인천과 하와이, 근대 이민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12월, 인천항은 고국을 떠나는 회한의 눈물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기대감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고국을 떠나 이민지 하와이로 가기 위해 일본 우선회사 소속의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1860년부터 시작된 한인의 해외 이주는 만주·러시아·미주 등지로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만주·러시아 등 한국과 인접한 지역의 이주는 유이민적(流移民的)성격으로 공식이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국 최초의 정식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하와이를 향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데서 비롯된다.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총 64회 7천400여 명의 이민이 계속됐다.


하와이에서는 19세기 초 사탕수수 농업이 크게 발달해 하와이 경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자체 노동력의 부족으로 거의 외국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하와이 노동이민은 19세기 중반 중국인(1852)과 일본인(1868)에 이어 20세기 초 한인의 이민이 시작됐던 것이다.

당시 인천항을 중심으로 하와이 이민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이민의 주선은 알렌(H.N.Allen)이, 실제적인 업무총괄은 데쉴러(D.W.Deshler)가, 설득과 권유로 이민자들을 모집한 것은 존스(G.H.Jones)목사였다. 특히, 알렌의 추천으로 고종 황제에게 하와이 이민사업 책임자로 임명된 데쉴러는 알렌과 같은 미국 오하이오(Ohio)주 출신으로 은행가 집안의 후손이었는데 일본 고베(神戶)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 제물포로 건너와 사업을 모색하고 있던 25살의 젊은이었다. 그는 이민모집을 위해 내리교회 부근에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와 이민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데쉴러은행(Deshler Bank)을 설립했다.

   
 

그러나 정작 낯선 땅에 간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지원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데쉴러는 내리감리교회의 존스 목사에게 이민자 모집을 요청했는데, 첫 이민선 갤릭(S.S.Gaelic)호에 승선한 이민자 중 절반 가량이 바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하와이 첫 이민단은 유민원(綏民院:그간 이 기관에 대해서 주로 수민원이라는 발음으로 통용되고 있었지만, 당시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 알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윤치호의 영문일기 속에 유민원으로 표현됐던 것으로 봐서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총재 민영환(閔泳煥) 명의의 집조(執照:여권)를 발급받고 겐카이마루에 승선해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들러 신체검사를 하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보건 당국의 검사를 거쳤는데 86명만이 상륙허가를 받고 오아후 섬 와이아루아(Waialua) 농장의 모쿨레이아(Mokuleia)캠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했는데,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인 이민자들은 낯선 환경과 고된 노동 속에서 힘들게 번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무엇보다 자녀교육에 진력해 한인학교를 곳곳에 설립하고 한글교육을 시행함으로써 국권회복과 조국의 얼을 심어주려 했다. 그 정신의 구현이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하는 것에도 반영됐다.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의 첫 자를 따서 ‘인하(仁荷)대학’의 교명이 탄생했듯이 인하대학의 설립자금에는 하와이 교포들이 보낸 하와이 한인기독학원(1918) 부지 매각대금(15만 달러)과 정부의 지원금(100만 달러) 및 시민들의 성금이 포함된 것이었다.

   
 



인하대학의 설립이 초기 이민자들의 정신적 귀환을 담은 것이라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2008년 6월 13일 인천 월미도에 개관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오늘을 사는 이민의 후손과 국내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한민족공동체의 실제적인 귀환을 구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나아가 다문화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우리 사회에 이미 들어와 있는 국내 이주자 문제 역시 우리가 포용해 갈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인천과 근대의 이민(移民)은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 인천과 멕시코·쿠바 이민

1905년 4월 인천항은 또다시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곳을 향해 새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의 이별과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멕시코 이민은 1904년 영국인 마이어스(John G. Meyers)가 멕시코 농장주들과 동양인 이민을 계약하고 중국과 일본에 가서 이민을 모집하려다가 실패한 후 한국에 와서 대륙식산회사(大陸殖産會社)를 경영하던 일본인 오오니와 간이치(大庭貫一)와 결탁해 노동이민을 모집함으로써 시작됐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이민모집이 실패한 것은 이미 멕시코 노동이민이 불법성을 띤 나쁜 조건의 계약노동임이 탄로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이어스와 공모한 오오니와 간이치는 대륙식산회사를 확장해 서울·인천·개성·평양·진남포·수원 등 6곳에 대리점을 두고,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황성신문 등에 그럴듯한 조건을 제시한‘농부모집’의 과대광고를 내는 등 갖가지 방법을 써 가난한 이민자를 전국 18개 지방에서 1천33명이나 끌어 모았다. 그 중 인천 출신들도 225명이나 됐다.

   
 

들 이민자는 오오니와 간이치와 통역 권병숙(權丙淑)의 인솔하에 영국선 일포드호(S.S.Ilford)에 탑승, 1905년 4월 2일경 인천을 출발해 75일간의 항해 끝에 멕시코 살리나 크루스(Salina Cruz)에 도착했다. 이민 브로커들이 개입해 단 한 차례에 끝난 대규모의 불법 계약 노동 이민이었던 탓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네켄 밭이었다. 그 후 이들 노동이민은 30여 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4년간의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배치된 에네켄 아시엔다(Hacienda)는 멕시코 특유의 농장제도다. 아시엔다 제도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의 유산으로 농장주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동력은 주로 채무노예에 의존하는 등 반봉건적·전근대적 성격이 강했다. 에네켄 아시엔다로 배치된 한인들은 형식상 계약노동이었지만 실제적으로 채무노예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멕시코 한인의 비참한 생활상이 국내에 알려져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민이 금지되기도 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한인들은 1909년 5월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고 해방이 될 수 있었지만,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한인들의 생활은 향상되지 못했고 1921년 멕시코 한인 288명은 다시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됐다. 그 후 멕시코 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과의 혼혈이 증가하고 한국어를 잊어감에 따라 민족 정체성도 점차 상실돼 갔다.

   
 


쿠바로 재이민을 갔던 멕시코 한인들 역시 이들이 쿠바에 도착할 무렵 국제 설탕가격이 폭락하면서 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인들은 마탄사스 농장 지역의 에네켄 농장에서 집단촌을 형성했다. 그 해 6월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쿠바 내정의 변화로 한인 단체들이 와해되면서 세대교체와 함께 정체성의 상실도 가속화됐다. 특히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남한과 미국의 한인회 등과 단절돼 전통적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이어가기 힘들게 됐다. 쿠바의 한인 후예들은 대부분 원주민과 결혼하면서 뿌리를 잊은 채 쿠바에 동화돼 쿠바의 코레아노가 됐던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