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풍경(10)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3) - 인천미두취인소-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는 1896년 5월 5일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에 개설됐는데, 일제가 미곡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설립한 기관이다. 취인소(取引所)는 ‘거래소’라는 의미이며 주로 1차 생산품을 거래하는 시장을 말한다. 초기에는 쌀, 대두, 석유, 명태, 방적사, 금사, 목면 등 7가지 상품에 대한 거래를 하다가 1904년부터 운영상의 문제로 거래품목을 미곡(米穀)과 대두(大豆)로 한정했다.
인천항의 일본 상인들은 미두취인소가 설립되기 전에 인천항객주조합이나 신상회사 및 근업소 등의 단체로 인해 유통시장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 미두취인소였는데 외국인 상사들의 반대 여론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1896년 4월 1일 미두취인소의 설립 허가를 받았다. 허가 과정은 우리 정부를 배제한 채 인천항에 있었던 일본영사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에 설립된 인천미두취인소는 이 해 5월 5일 자본금 3만 원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에서 1893년에 취인소법이 제정된 후 3년 만에 인천에 미두취인소가 개설된 것이다. 1898년 9월에 일본영사에 의해 해산돼 일시 휴업하기도 했지만 1899년 5월부터 다시 시작됐다.
당시 미두취인소의 설립 취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6가지의 내용이었다. 첫째, 인천항이 미두의 집산지이나 가격 품질의 표준이 없어 취인이 어렵다. 둘째, 취인소를 설립해 가격 품질의 표준이 정해지면 미두의 수출이 편리하다. 셋째, 취인소를 설치해 가격의 고하를 정해 품질의 개량을 도모하고자 한다. 넷째, 백미의 질이 조악해 부패하므로 그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다섯째, 오지 행상해 미두를 매집하지만 가격의 추세를 알지 못하는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여섯째, 취인소를 설치하면 미두가 인천항에 집산돼 한일무역을 진보시킨다는 것 등이었다. 즉, 일본으로의 미곡반출을 위해 미곡의 집산을 필요로 하고 미곡의 집산과 거래의 표준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 표면적인 설립이유였다.
그러나 인천미두취인소 설립에는 일본상인들이 곡물거래의 주도권을 쥐려는 것과 함께 곡물의 가격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투기적 의도도 있었다. 그러므로 오사카(大阪) 기미시장(期米市場)에서 투기거래를 통해 파산한 일본상인들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투기거래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인들을 시장에 유인해 토착자본을 흡수하려는 의도가 배경에 놓여 있었다. 당시 “땅문서는 동척(동양척식회사)으로 들어가고, 현금은 인천에 떨어진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전자는 토지조사사업 등에 의한 일본의 토지수탈을 의미하고 후자는 인천미두취인소의 투기거래를 통해 한국인이 자본을 날리던 상황을 의미했다.
미두취인소에서의 거래는 오늘날 증권 거래와 거의 비슷했다. 증권 거래가 채권, 주식 등 유가 증권을 대상으로 한다면 미두취인소는 현미 등 미곡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거래는 3기로 구분해 1개월 내 거래된 매도, 매수 물량을 거래 당사자 간에 정리하는 방식의 선물 거래였는데 취인소가 인가한 중매점을 통해 거래하도록 돼 있었다.
중매점은 거의 일본인 차지였고 조선인으로는 인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유군성, 개성 부자 김익환, 평안도 대지주 장최근뿐이었다. 시장은 하루에 전장, 후장 2번씩 열렸고 매매 단위는 미곡 100석, 대두 50석으로 해 호가는 모두 1석의 가격으로 했다. 시세는 오사카 취인소 시세에 따라 변동했다. 2석당 1원인 보증금을 중매점에 예치하면 누구나 거래를 할 수 있었고 기한 내에도 시세에 따라 처분할 수 있었다. 현물 없이 보증금만 가지고 거래가 성립됐고 아무 때나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미두취인소는 기미(期米)를 통한 일종의 도박장으로 투기와 가격 조작이라는 문제로 인해 운영 과정에서 적잖은 폐해를 낳았다. 반복창, 조준호 등과 같이 성공한 미두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 지주와 중소기업인, 일확천금을 꿈꾸고 인천항에 미곡을 싣고 온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를 털리거나 매매 차익을 노리고 투자했다가 패가망신하는 예가 허다했다. 또 미두의 영향으로 인천항 일대는 요릿집, 주점, 여관 등의 향락 산업이 번창했다. 기록에 따르면, 미두취인소의 고객은 90%가 한국인이었고 이들이 약 15년간 미두장에 바친 돈이 수억 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해가 확산되자 당시의 『개벽』에 실린 표현처럼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인천미두취인소를 ‘피를 빨아 먹는 악마 굴이요, 독소’라 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두취인소 내부적으로도 파행적인 운영과 오직(汚職)사건으로 1898년과 1919년 2차례에 걸쳐 해산되고 임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폐단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서도 한일합병 후 인천미두취인소가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각처에 돈 바람이 불고 미두취인소의 설립 신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인천미두취인소의 서울 이전 문제가 지역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는데, 당시 ‘인취문제’라 불렸던 이 사건은 1922년 10월부터 10년간 긴 줄다리기 끝에 조선총독부가 1931년 조선거래소령을 공포하고 인천과 경성주식현물거래소를 통합키로 함에 따라 인천의 패배로 끝이 났다.
1925년 와카마쓰(若松) 사장은 경성주식현물시장과 인천거래소의 합병을 계획했다가 인천부민의 반대에 부딪혀 퇴직하고, 아라이(荒井初太郞) 역시 사장에 취임하자 합병을 시도했다. 결국 1931년 5월 20일 조선거래소령이 발포돼 이 조선거래소령에 의해 1932년 1월 1일부로 양자(경성거래소, 인천거래소)의 합병을 인가받아 1월 10일 두 시장의 해산을 실시하고 동시에 합병해 조선거래소로 개칭해 경성에 본점을 두고 인천에 지점을 두어 경성에서는 주식, 인천에서는 미두의 정산 및 현물매매거래를 행하게 됐다.
서울 소재 경성주식현물거래소에 운영권을 빼앗긴 인천미두취인소는 경성거래소 기미부로 전환된 채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통제 경제에 밀려 휴업 상태에 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문을 닫았다.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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