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장 풍경(11)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4)
- 최초의 천일염전, 짠물을 유래시킨 소금밭-
소금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식품으로 우리 나라에는 간장·된장·고추장 같은 장문화를 발전시켜 왔고 소금을 이용해 젓갈을 담근다거나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소금 간을 해 어패류를 저장 ·유통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자염(煮鹽)이라 하는데 해수(海水)를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하며, 화염(火鹽), 전오염(煎熬鹽), 육염(陸鹽)이라고도 했다. 서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넓은 간석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한 갯벌에서는 개흙과 짠물을 이용해서 농도가 짙은 소금물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몇일 동안 쉬지 않고 끓여야 하는 속성으로 인해 연료비나 인건비 등의 경비가 과다하게 지출됐다.
개항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소금의 수요가 증가해 갔고, 그에 따라 제염지도 확대돼 갔다. 특히 개항 이후 소금에 절인 음식물이 보편화되고 소금에 절인 어물(魚物)의 소비가 증가해 외국산 소금도 유입되고 있었다. 일본상인이 일본 소금을 처음으로 수입한 시기는 1885년으로 이후 1890년대 말까지 일본 소금의 수입량은 증가했지만, 조선인은 조선 소금의 소비에 익숙해 있었고 외국 제품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어 수입된 일본염의 판매는 순조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항을 배경으로 한 경기도지방에서는 외국 소금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1898년을 기점으로 청국산 소금이 수입되고 1903년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 보급되면서 국내 제염업자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청국의 소금은 천일염이고 일본염과 조선염은 자염(煮鹽, 끓여서 만든 소금)이었기 때문에 조선 소금 반 정도의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그리해서 청국염의 수입량은 계속 늘어났는데, 청국상인들은 관세를 물지 않고 염을 밀수입해 조선인에게 몰래 판매한 후 그 대가로 쌀, 콩, 조 등 잡곡과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반면 청국의 천일염은 비록 가격은 저렴했다 하더라도 제염 기술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소금발이 굵어 식용으로 쓰기가 어려웠고 검은 빛깔을 띠고 있어 먹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정부는 개항과 함께 값싼 수입염이 물밀듯이 들어왔으므로 인천지역에는 농공상부가 관할하는 인천제염소를 설치했다. 종래의 수공업적인 제염법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계측도구를 이용해 생산 기술력을 높이려 한 것으로 1900년부터 인천제염장에서 자염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의 자염 제염장은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인천에서는 개항 이후 값싼 수입 소금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으므로 이를 다시 제조하는 재제염(再製鹽)이 크게 부흥했다. 값싼 천일염을 자염과 비슷하게 가공하지 않고는 조선인에게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해서 일본인들은 청국 소금을 구입해 다시 제조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청국 소금이 본격적으로 수입된 1903년 이후에 성행했고, 인천·부산·원산 등지에서 주로 행해졌다. 재제염은 입자가 큰 청국 소금을 다시 녹여 깨끗하고 입자가 모래처럼 고운 백색 소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판매가 부진했으나 일상적인 식생활에 뿌리를 내리면서 1908년부터 인천에 재제염 공장이 들어서게 됐다.
한편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대규모의 군사비용과 재정지출이 커지자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매제도를 강화시켜 재원확보에 주력했다. 그리해서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배권을 강화시키면서 조선 내의 소금을 독점하고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청에서 밀려오는 값싼 천일염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조선 내에 천일염전을 구축해 값싼 천일염을 관염(官鹽)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라 판단했다.
천일염전은 염전을 축조하고 해수를 도입해 태양열과 풍력 등 자연력에 의존해 소금을 결정시키는 제염법으로 막대한 양의 해수를 원료로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기계설비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보여주는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전매체제로 통제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갯벌의 땅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천일염전을 개발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 주안염전 축조
1907년 일본 대장성의 조사와 자문에 기초해 인천의 주안면 십정리에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최초로 시험용 염전 1정보를 축조했는데, 중국이나 대만보다 양호한 천일염이 생산됨에 따라 이를 토대로 190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됐다. 인천은 생산된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거대한 배후 시장이 있고, 경인철도로 인해 신속한 물류가 가능한 최적의 입지 조건이었다. 또한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의 반출을 손쉽게 하려는 목적도 내포돼 있었다.
▶제1기(1907~1914) : 주안(99정보), 광양만(廣梁灣, 934정보) 등
▶제2기(1919~1920) : 주안(139정보), 덕동(德洞, 평안남도,226정보) 등
▶제3기(1921~1924) : 남촌(南洞, 300정보), 군자(君子, 575정보), 귀성(貴城, 평안남도), 남시(南市, 평안북도), 등 1천241정보
▶제4기(1934~1945) : 소래(蘇萊, 549정보), 연백(延白, 1천250정보), 귀성(1천36정보) 등
(※ 1정보(町步)는 3천 평으로 약 9천917.4㎡에 해당한다.)
인천 일대의 염전 축조상황을 보면 제1기 99정보(주안), 제2기 139정보(주안), 제3기 875정보(남촌, 군자), 제4기 549정보(소래) 등으로 천일염전은 점차 증대하고 있었다. 인천의 주안이나 남촌염전(오늘의 남동염전), 시흥의 소래·군자염전 등이 쉽게 천일염으로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지형·기후·토질 면에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서울과 인천항을 근처에 둔 지정학적 유리함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인구의 소금 소비량, 인천 등 어항에서의 소금 소비량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수도권 내에서의 수송거리 단축으로 물류비용이 덜 든다는 점도 인천의 소금 유통에 유리한 점이었다. 또한 인천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경인철도, 인천과 수원을 연결하는 수인선철도, 동시에 이들 철도와 연계시켜 경부선·경의선 등으로 연결해 전국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소금이 실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의 소금 생산량은 늘어만 갔고, 1933년에 이르면 남동염전을 비롯한 전체 1천115정보의 인천 관내 염전에서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t을 생산해 냈다. 당시 일제는 인천출장소를 세워 염전과 그곳에서 생산된 소금을 관리하면서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공업용 소금의 상당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부득이한 조처이기도 했다.
# 소금 열차 수인선과 ‘짠물’인천
1937년 개통한 수원∼인천 간의 수인선 열차도 소금을 많이 실어 날라 흔히 ‘소금 열차’로 불렸다. 본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수인선은 1931년 개통한 수여선(수원∼여주 간 74.3㎞)과 맞닿아 있어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여주·이천 쌀의 수송도 맡았는데, 남동염전의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에 철교를 놓아 만든 것으로 처음부터 열차가 남동, 소래, 군자염전을 거쳐 가게 설계됐고, 실제로 이들 지역의 소금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소금과의 이 같은 여러 가지 인연은 그 뒤 지금까지도 인천이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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