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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2

재누리 2009. 3. 25. 18:09

인천 개항장 풍경(9) - 근대문화로 보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2)
- 인천 최초의 지점 은행-

 

우리나라에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이 설치된 것은 강화도조약 체결 한 달 후인 1876년 3월 일본 제일은행 은행장이었던 삽택영일(澁澤榮一)이 부산에 사설 은행을 설립한 것이 최초였다. 이후 1878년 3월 이 은행은 일본 제일국립은행에 인계돼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으로 영업을 시작한 후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에 출장소를 설치했다.

# 제일국립은행 인천출장소 설치
개항 이후 수출입 무역의 급격한 성장은 전통 금융업과는 상이한 형태의 근대적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을 요구했는데, 일본 제일은행은 풍부한 자금력과 선발주자로서의 이점이 있어 개항기 조선의 금융시장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1882년 조선 해관세의 취급권을 장악하고, 일본상인의 증가와 거래량의 증가에 따라 1888년 9월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했다. 동년 10월에는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를 개설했다.

제일은행 인천지점은 국내에 진출한 타 지역의 지점과 더불어 통상의 은행업무영역을 넘어서서 관세업무, 국고업무, 지금(地金) 은(銀) 매입, 은행권 발행 등 업무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1886년부터는 일본은행과의 약정을 맺어 조선금을 대량으로 매수하는 창구로 역할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는 임시 일본중앙금고파출소로 지정돼 군용금을 취급했고 또 일본은행으로부터 금 매입자금을 공급받음으로써 대규모 공적자금을 확보했다. 1902년에는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을 취득했으며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국고를 취급하고 화폐정리 사업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중앙은행으로서 기능했다. 1909년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해 중앙은행의 설립을 구체적으로 추진, 이 해 10월 자본금 1천만 원(圓)으로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이 업무를 개시하게 됨에 따라 제일은행 인천지점도 1909년 11월 24일 (구)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이양됐는데, 한국 금융계를 지배해 한국을 금융면에서 식민지화하는 기반을 구축했다.

   
 
  ▲ 일본제58은행지점  
 
 # 일본18은행과 58은행 인천지점 설치
1890년 10월 일본 18은행은 인천에 최초의 지점을 설치했다. 제18은행이 그 지점을 인천에 설치하게 된 이유는 일본의 대한경제침략의 거점이 부산에서 인천으로 옮겨짐에 따른 무역량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長崎)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일본상인들은 상하이에 수입됐던 영국 면직물을 다시 수입해 그것을 한국시장에 다시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영위함으로써 큰 이익을 거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나가사키 상인(長崎商人)들의 업무가 번창해져감에 따라 나가사키에 지점을 두고 있었던 제18은행의 지점을 대한 수출무역(對韓輸出貿易)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설치하게 됐던 것이다. 이 지점은 1936년 조선식산은행(朝鮮植産銀行) 인천지점에 그 업무를 인계했다.

1892년 7월에는 일본 5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설치했다. 58은행은 187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설립한 은행으로, 은행장이 조선 정부의 화폐제도 개혁을 위한 고문으로 초빙돼 온 인연으로 설립하게 됐는데, 인천 전환국(局)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18·58은행은 양국에서 송부한 상품대금의 결제를 위한 하환(荷換)어음을 인수해 조선-일본 간의 무역금융에도 주력했다.

 # 유럽 은행의 인천진출
일본계 은행 이외에도 구미의 은행이 들어와 영업을 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향항상해은행(香港上海銀行)과 한러은행이 있다. 향항상해은행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본점을 두고 있는 영국선박회사 홈링거회사가 홍콩상해은행의 대리점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이 대리점이 인천에 다시 대리점을 설치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됐다. 한러은행은 1898년 3월 1일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 안에 제일동아(第一東亞)지점으로 개설됐는데, 본점은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있었다. 이 은행은 1898년 반러운동의 와중인 6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들 외국계 은행들은 주로 중국·영국 및 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송금업무를 담당해 그 활동 범위는 매우 좁았다.

반면 일본 은행들의 적극적인 금융지원으로 개항장에 거점을 둔 일본상인들은 점차 조선의 전통 상권과 유통경로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시작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상인들의 내지 진출이 본격화하고 수출입 무역이 크게 증가하면서 이 같은 추세는 두드러지고 있었다.

 # 조선의 민족은행 조선은행 설립

   
 
  ▲ 조선상업은행  
 

개항 후 일본인들의 금융침투가 계속되기에 이르자,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갑오개혁 이후 민족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조선의 민족은행이 설립된 것은 1896년 조선은행이 효시다. 조선은행은 이후 독립협회를 주도한 고위 관료와 그들과 협력관계에 있던 서울의 상인들에 의해 설립됐는데, 정부재정기관으로서 전국 조세금의 취급권을 갖고자 했고, 탁지부의 국고금을 예치하기도 했으나 1899년 한흥은행으로 개칭돼 유지하다가 1901년 폐점했다. 뒤이어 1897년 2월 인가된 한성은행(漢城銀行 : 후일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해 조흥은행으로 개칭)은 정부발행 환표 등의 매입과 화폐 교환, 금·은 등을 담보로 한 대출취급 등을 했으나 영업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1899년 1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 1911년 조선상업은행, 광복 후 상업은행으로 개칭,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개칭)이 설립됐다. 당시 대한천일은행이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한 청원서를 보면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을 창립이념으로 삼았고,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국가 경제 발전을 목표로 했다. 또한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외세로부터 은행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은행명 또한 당시 일본 제일은행을 의식해 ‘하늘 아래 첫 번째 은행’이라는 대한천일은행이라 명명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은 일본 자본의 증가와 함께 일본은행 설립으로 외국 금융침투가 심각해지자 서울의 유력한 상인들이 중심이 돼 설립을 주도하고 고종의 윤허를 얻어 왕실의 내탕금까지 지원받아 설립한 순수 민족은행이었다. 따라서 대한천일은행에 대한 황실의 지원이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했으며 일반은행의 역할과 함께 황실은행 내지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 개설
이어 1899년 5월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을 개설함으로써 국내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 개설은행이 됐고, 각 군의 조세금을 취급하고 있었다. 이처럼 1890년대에 설립된 대부분의 민족은행들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나, 대한천일은행만은 민족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 일본제18은행지점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우리나라의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정비됐는데, 1911년 2월 28일 조선은행법이 공포됨에 따라 구 한국은행이 폐쇄되고 새로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이 설립됐다. 인천지방의 금융기관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에 따른 금융제도의 개편에 따라, 설치됐던 지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07년 개설됐던 한성공동창고 주식회사 인천출장소는 한성공동창고가 대한천일은행이 개칭한 조선상업은행에 병합됨에 따라 1912년 3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됐다. (구)한국은행 인천지점은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됐다. 또 농공은행 등을 통합해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현재의 산업은행에 해당)도 다음 해인 1919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했다.

이로써 인천에는 한국에 본점을 가진 3개 은행의 지점과 일본에 본점을 둔 2개 은행의 지점(일본 제18은행과 제58은행의 지점)이 인천의 금융업무를 맡아왔는데, 그 중 일본에 본점을 둔 2개의 지점은 금융계 통합정비에 따라 폐쇄됐다. 그런데 1929년 설립된 조선저축은행(朝鮮貯蓄銀行, 광복 후 조선식산은행의
   
 
  ▲ 금융조합  
 
업무, 지점을 승계받아 제일은행으로 개칭) 인천지점이 1933년 11월 개설됨에 따라 인천의 금융업무는 조선은행·식산은행·상업은행,·저축은행의 4개 인천지점이 담당했다. 이들 금융기관의 주 임무는 여전히 일본의 통치 자금 조달이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된 공업화의 자금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키 위한 일본계 금융기관들의 수탈 행각은 한일합병 이전보다 더 다양해졌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