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고등학교 밀집지역 전동
성공회 성당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려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두 고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제물포고등학교와 인일여자고등학교가 그 곳이다.
이들 학교에선 해방 이후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면서 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데 일조했다.
지금도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을 하는 졸업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두 학교가 위치한 곳이 바로 동인천동의 법정동인 전동(錢洞)이다.
전동이란 이름은 1892년 이 일대에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 전환국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된 데서 유래한다.
지금의 제물포고와 인일여고 외에도 1998년 연수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기 전까지 인천여고도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전동은 한 때 '인천 교육의 메카'로 불렸던 곳이다.
자유공원길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란히 맞닿은 제물포고와 인일여고를 볼 수 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잡은 응봉산 분지를 옛날에는 '웃터골'로 불렀다.
웃터골이란 '위의 터 혹은 높은 터'라는 의미다.
당시 인천시의 중심지로서 이곳이 시내 어디서 바라보아도 응봉산 산등성이와 그 골짜기가 우뚝 높아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웃터골은 1920년에 정지(整地)돼 1935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쓰였다.
이곳에서 일인에 대항해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善戰)과 단장 곽상훈(郭尙勳) 의원의 일화가 전해진다.
언론인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다.
아주 상징적이면서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바로 유명한 3·1 독립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이 광복 후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둥학교를 개교했기 때문이다.
아주 상징적이면서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바로 유명한 3·1 독립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이 광복 후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둥학교를 개교했기 때문이다.
인천중학교는 평준화 시책 때문에 없어졌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다. 하지만 고일 선생이 지적한 '민족혼'을 이어받아 이 자리에 두 학교가 문을 열어 인천은 물론 전국적인 명문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특히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는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개교'였다고 평가를 받는다.
우리나라 첫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전교생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 스스로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많은 풍상과 변화를 겪었지만 제물포라는 지명은 또 이렇게 학교 이름으로도 남아 있다.
제물포고에는 좀 색다른 문화재가 있다. 바로 강당 건물인 '성덕당'이다.
지난 2008년 10월 27일 등록문화재 제427호로 지정된 성덕당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인천중학교의 강당으로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벽돌조 건물이다.
지금의 교사(校舍)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올해로 66년이란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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