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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의 영종도와 주민들의 모습

재누리 2013. 1. 28. 05:56

 

1867년 당시 영종도와 삼목도, 용유도 등(이하, 이들 세 섬을 통칭하는 경우 ‘영종’이라 함)에 살았던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호적(戶籍)자료를 소개했다. 이번 호에는 이 호적자료를 통해 ‘영종’ 주민들이 어떻게 구성돼 있었는가를 소개해 본다.

 # 1867년 당시 ‘영종’ 주민수는 최소 5천 명

영종호적에 올라 있는 주민은 모두 2천781명으로 남자가 1천552명, 여자가 1천229명이다. 섬별로는 영종도가 1천976명(남자 1천93명과 여자 883명)으로 가장 많았고, 용유도가 637명(남자 366명과 여자 271명), 삼목도가 168명(남자 93명과 여자 75명) 등이었다. 이들 세 섬 모두 남자 인구가 더 많아 전체적으로는 323명이나 여자 인구가 적었다. 이는 100명을 기준으로 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26명 정도 더 많았던 셈이 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실재의 모습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호적 자료는 시집 안 간 딸은 물론, 나이 어린 아들조차 거의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아예 호적에 올라가지 않은 성인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들을 염두에 두고, 1867년 당시의 ‘영종’ 주민수를 사실에 가깝게 추산하면 5천 명 정도였다고 본다. 호적에 누락된 주민수가 최소 2천300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구사회학자들 또한 조선 후기에는 호적 조사 때 절반 정도가 빠졌다고 이해하고 있다.

참고로 2007년 12월 말 기준, ‘영종’의 주민수는 2만9천301명(영종동 2만5천248명과 용유동 4천53명)이라 한다. 140년 전에 비해 약 6배가 증가한 셈이다.

   
 
  ▲ 1917년 지도를 통해 복원한 1867년 당시 영종진 소속 5개 면(面)  
 
 # 1867년 당시 ‘영종’ 주민 중 김해 김씨·전주 이씨·경주 김씨가 30%

그러면, 당시 ‘영종’ 주민의 성관(姓貫) 분포는 어떠했을까· 먼저, 호수(戶首 : 지금의 세대주 개념) 908명의 경우,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15%(134명)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전주 이씨(全州李氏 : 8%·72명), 경주 김씨(慶州金氏 : 7.7%·70명), 경주 정씨(慶州鄭氏 : 5%·46명), 인동 장씨(仁同張氏 : 4.8%·44명), 영광 장씨(靈光張氏 : 4%·40명) 등이었다. 이 밖에 경주 최씨(慶州崔氏 : 30명), 진주 강씨(晉州姜氏 : 26명), 문화 류씨(文化柳氏 : 20명), 밀양 박씨(密陽朴氏 : 19명), 파평 윤씨(坡平尹氏 : 19명), 여주 추씨(驪州秋氏 : 14명), 남평 문씨(南平文氏 : 13명), 경주 이씨(慶州李氏 : 12명), 제주 고씨(濟州高氏 : 11명), 해주 오씨(海州吳氏 : 11명), 순흥 안씨(順興安氏 : 10명), 기계 유씨(杞溪兪氏 : 9명), 한양 조씨(漢陽趙氏 : 6명) 등도 주요 성관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다음, 호수 처 777명의 성관 분포를 살펴보면, 호수에서의 양상과 마찬가지로 김해 김씨가 13%(103명)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전주 이씨(8%·63명), 경주 김씨(7.6%·59명), 영광 장씨(5%·38명), 진주 강씨(4.4%·34명), 경주 정씨(4.2%·33명), 밀양 박씨(3.9%·30명), 인동 장씨(3.7%·29명)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이 밖에 경주 최씨(22명), 문화 류씨(15명), 달성 서씨(達城徐氏 : 14명), 파평 윤씨(12명), 남평 문씨(11명), 기계 유씨(8명), 한양 조씨(6명) 등도 주요 성관이라 할 수 있다.

   
 
  ▲ 한말 조선인 가족의 모습  
 


따라서 1867년 당시 ‘영종’에 살았던 주민(호수와 그 처)들 가운데 김해 김씨와 전주 이씨·경주 김씨 세 성관이 주민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양상은 호수와 그 처의 성관 분포의 상위 순서가 거의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즉, ‘영종’에서는 지역 내의 주민끼리 통혼을 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고 하겠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기는 하다.

현재 ‘영종’은 섬이라 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연륙교가 놓여졌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또 다른 연륙교도 개통된다고 한다. 또한 국제공항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상전벽해(桑田碧海)적 변모는 ‘영종’ 주민들에게 ‘기회(=행운)’와 ‘좌절(=불행)’의 야누스(Janus)가 돼 다가갔을 것이다. 큰 걱정은 그것이 기회였던 좌절이었던 간에 둘 다 옛 주민들의 지역 ‘전통’과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1867년 당시의 주민 모습은 물론, 그 잔영조차도 찾아보기 어렵겠다.

   
 
  ▲ 시 문화재자료인 영종도의 조병수 가옥  
 
호적자료에 그 모습을 감춘 140년 전의 ‘영종’ 주민들의 행간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면서 문뜩 스쳐 지나간 잡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과거와 현재의 ‘영종’ 주민들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타임머신이 돼버린 ‘1867년 영종진호적대장’을 귀환시켜야 하겠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