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당시 영종도와 삼목도, 용유도 등(이하, 이들 세 섬을 통칭하는 경우 ‘영종’이라 함)에 살았던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호적(戶籍)자료를 소개했다. 이번 호에는 이 호적자료를 통해 ‘영종’ 주민들이 어떻게 구성돼 있었는가를 소개해 본다. # 1867년 당시 ‘영종’ 주민수는 최소 5천 명 영종호적에 올라 있는 주민은 모두 2천781명으로 남자가 1천552명, 여자가 1천229명이다. 섬별로는 영종도가 1천976명(남자 1천93명과 여자 883명)으로 가장 많았고, 용유도가 637명(남자 366명과 여자 271명), 삼목도가 168명(남자 93명과 여자 75명) 등이었다. 이들 세 섬 모두 남자 인구가 더 많아 전체적으로는 323명이나 여자 인구가 적었다. 이는 100명을 기준으로 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26명 정도 더 많았던 셈이 된다.
그러면, 당시 ‘영종’ 주민의 성관(姓貫) 분포는 어떠했을까· 먼저, 호수(戶首 : 지금의 세대주 개념) 908명의 경우,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15%(134명)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전주 이씨(全州李氏 : 8%·72명), 경주 김씨(慶州金氏 : 7.7%·70명), 경주 정씨(慶州鄭氏 : 5%·46명), 인동 장씨(仁同張氏 : 4.8%·44명), 영광 장씨(靈光張氏 : 4%·40명) 등이었다. 이 밖에 경주 최씨(慶州崔氏 : 30명), 진주 강씨(晉州姜氏 : 26명), 문화 류씨(文化柳氏 : 20명), 밀양 박씨(密陽朴氏 : 19명), 파평 윤씨(坡平尹氏 : 19명), 여주 추씨(驪州秋氏 : 14명), 남평 문씨(南平文氏 : 13명), 경주 이씨(慶州李氏 : 12명), 제주 고씨(濟州高氏 : 11명), 해주 오씨(海州吳氏 : 11명), 순흥 안씨(順興安氏 : 10명), 기계 유씨(杞溪兪氏 : 9명), 한양 조씨(漢陽趙氏 : 6명) 등도 주요 성관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1867년 당시 ‘영종’에 살았던 주민(호수와 그 처)들 가운데 김해 김씨와 전주 이씨·경주 김씨 세 성관이 주민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양상은 호수와 그 처의 성관 분포의 상위 순서가 거의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즉, ‘영종’에서는 지역 내의 주민끼리 통혼을 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고 하겠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기는 하다. 현재 ‘영종’은 섬이라 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연륙교가 놓여졌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또 다른 연륙교도 개통된다고 한다. 또한 국제공항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상전벽해(桑田碧海)적 변모는 ‘영종’ 주민들에게 ‘기회(=행운)’와 ‘좌절(=불행)’의 야누스(Janus)가 돼 다가갔을 것이다. 큰 걱정은 그것이 기회였던 좌절이었던 간에 둘 다 옛 주민들의 지역 ‘전통’과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1867년 당시의 주민 모습은 물론, 그 잔영조차도 찾아보기 어렵겠다.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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