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떨어진건 알았지만, 항복할 줄은 몰랐어” 15일에 퇴근하고 집에와서 일본천황의 방송 듣고 해방 알아... |
내가 일하던 인천조선 배공장에서 8월 6일 정오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걸 방송에서 들었지. 그때 일본사람들은 원자폭탄을 '신가다바꾸다이'(새로 나온 폭탄)이라고 불렀지. 자기네들 내부에서는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가 돌고 있었던 것 같아. 바로 거리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기본이 좋아서 들떠 있었지. 그날 나는 동인천에 나갔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지. 그리고 용동 싸리재를 지나 애관극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 자세히 보니 인천의 건달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는데, 머리 허연 영감이 이승만 박사가 배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온다며 마중 나가자고 했어. 헌병들은 사람들에게 해산하라고 하며 위협을 했지. 그리곤 말에서 내려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발로 차고 그랬지. 신포동 사거리 쪽에서는 헌병들이 칼을 들고 때리기도 했어. 지금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 집으로 돌아왔지. 일본 사람들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짐까지 날라주었지.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집을 밑에 일하던 사람들에게 주고 갔지. 가게니, 물건들도 다 주고 갔어. 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사람들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공장은 문을 닫았어.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다른 일을 찾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지. 그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공장이 안 돌아가고 일손을 놓고 있으니 금방 많이 모였어. 모여서 잡아 놓은 일본 사람들을 밤낮주야로 감시하며 돈을 요구했지. 어떤 사람은 800원도 받고, 1000원이나 1200원씩을 받기도 했지. 그때 돈 1200원이면 한 달 생활비정도 될거야. 그래서 생선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았어. 그렇게 만석동은 그런대로 활력이 있었지. 해방되고 나니 나는 자유의 몸의 되어 좋았어. 해방전에는 징용이 무서워서 편하게 놀 수도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어. 다른 장사를 해보려고. 돌아보니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장사라는 것이 엄두가 안 나더군. 조금 모아둔 돈이 있어 모루(달군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쇠덩이) 한 개, 함머 세 개, 망치 한 개, 집게 한 개를 사서 일을 시작했어. 다른 것들이야 다 만들면 되지. 그런 거 못하면 대장간을 차리지도 못해. 저기 저 모루가 그때 산 건데 지금은 구하지도 못해. 그때도 구하기 힘들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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