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와 대중과의 첫만남은 춘천 향토제였다.
이때 부른 수심가로 3위에
입상한 김추자는 이은관(배뱅이굿으로 유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창도 맛깔나게 불렀다.
처음으로 가수의 꿈을 심게된 순간이었다.
교육자들인 언니들과 달리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정한 것 이때문이다.
김추자는 신입생 노래자랑 대회에서
끼가 넘치는 춤과 노래로 심사위원, 관객 모두의 열광적인
호응속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최고인기학생으로 자리 잡았다.
18세 대학신입생은 신중현의 동생 신수현의 소개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작곡가 신중현의 삼각지 녹음실로 무작정
첮아갔다.
당시 인기절정의 유명가수 김상희와 신곡 발표준비로
분주하던 신중현이 김추자에게 눈길을 줄리가 만무
그래도 모른척
일주일동안 매일 찾아갔다.
귀찮아 내쫓을 궁리로 시켜본 노래테스트
김추자는 단한번의 기회를 놏치지않고 신중현의 마음을 앗아가버렸다.
김추자의 데뷰앨범은 69년10월20일 출시된 "늦기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예그린레코드) 신중현이 이끄는 '뉴덩키스'는
우리 국악의 창과 접목한 전혀 새로운 싸이키한 감각적 연주를 시도했다.
처음 음반이 나왔을때 대중들은 낯설은 사운드에 어리둥절했지만
신선한 여대생 김추자의 열정적인 춤사위와 싸이키창법에 이내
열광하였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소울 싸이키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케 했다.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판권을 이어받은 성음제작소는 더블, 싱글자켓등 여러가지 버젼의
재판들을 동일날짜로 발매했을 정도로 데뷔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났다.
호사다마라 할까 인기가 치솟은 김추자의 주변은 장안의 건달들이
들끓게 되엇다.
이때3곡을 부르면 데뷔앨범작업을 함께한 프로레슬러 출신 소윤석은
보디가드겸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된다 김추자의 첫스캔들 상대는 가수
박일남. 김추자를 놓고 벌였던 박일남과 소윤석의 스카라극장앞
노상혈투는 당시 사회를 벌집 쑤신듯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데뷔앨법에서 발표한 창과 싸이키를 버무린듯한 창법의 '늦기전에'와
사회분위기가 맞아 떨어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2면 수록곡인 "떠나야할 그사람"은 숨겨진 명곡 후회
펄씨스터즈가 리바이벌해 큰 인기를 얻었던 곡이지만
미8군에서 명성을 날리던 김선을 영입해 결성한 '뉴덩키스'의
꽹과리소리와 작렬하는 전자키타가 빚어내는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는
시대를 한참 주월했다.
더구나 김선의 뛰어난 보칼로 구성된 7분40초의
롱버전은 소름끼치는 감동까지 선사했다.
69년 데뷔앨범 발표이후
71년까지 김추자는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소공동 '라스베가스'를 주무대로 방송출연, 콘서트 등 눈코
뜰새없이 인기 강행군을 버렸다.
신문방송의 가수상을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출연스케줄을
어기고 잠적을 밥먹듯이 하여 '다이나마이트'외에 '구름같은 김추자'라는
또하나의 별명을 얻게 된다.
방만한 스케줄관리와 약속의 불이행은
씻을 수 없는 그녀의 오점으로 남는다
71년7월초 배호와 김세레나와
함께한 부산의 쏘무대에서 휘날레를 장식할 가수를 놓고
김세레나와
머리채까지 잡는 한판 자존심 싸움을 벌인 뒤 출연도중 사라져버린
사건이 문제였다.
가수분과위원회(회장 최희준)는 한국가요사상
최초로 김추자에게 3개월 가수자격정지라는 극약처분을 내렸다.
이후 김추자는 유래가 없는 스캔들 메이커로 참새들의 입방아에
끊이지 않고 오르내리게 된다.
'국내가요 > 김추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이 내리네 / 김추자 (0) | 2012.01.25 |
---|---|
거짓말이야 (1971년작)/ 김추자 (0) | 2012.01.25 |
가버린 사람아/김추자 (0) | 2012.01.25 |
무인도/김추자 (0) | 2010.09.14 |
님은 먼곳에/김추자 (0) | 2009.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