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공부방/추억의자료

인천의역사

재누리 2008. 10. 4. 19:09
인천의 역사
 
미추홀(백제)→매소홀(고구려)→소성현(통일신라 경덕왕)→경원군(고려 숙정)→ 인주(고려 인종)→경원부(고려 공양왕)→인주(조선 태조)→인천(조선 태종13년, 1413)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의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 (757)에 이르러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의 고향이 됨으로 "인주"로 개칭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가 높여 놓았던「경원부」를 다시「인주」로 불려져 오게 되었다. 그러다 태종 13년(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군」이나「현」에 들어있는「주」를「산」이나「천」으로 고쳤는데, 이 때「군」의 격을 가지던「인주」는 비로소「인천」이란 읍호를 갖게 된다.

면적

964.53㎢(2001년을 기준)
 
인구수
 
271만40명(2007년12월31일 자정을 기준)
성별로는 남성이 137만2천611명으로 여성 133만7천429명보다 3만여명가량 많았다.
국적별로는 내국인 266만4천576명, 외국인 4만5천464명이었다.
세대수는 총 99만5천712세대(외국인 제외)이었다.
 
 
읽어 보면 좋은 내용
 
어린이용
 
인천 연혁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듯이~
1019년 인천항 갑문외
 
시대/연도
테이블
시대/연도
고대 757 삼국시대 백제의 미추홀, 고구려의 매소홀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 소성현 으로 개칭
고려 1018


1390
소성현이 수주 (부평) 에 소속됨
숙종 : 소성현이 경원군으로 승격
인종 : 인주로 승격
공양왕 2년 : 경원부로 승격
조선 1413
1460
태종 13년 : 인천군으로 개편
세조 6년 : 인천도호부로 승격
근대 1866
1871
1875
1876
1882
1883
1895
1899
1906
고종3년 : 병인양요
거종8년 : 신미양요
고종12년 : 운양호 사건
고종13년 : 강화도 조약 체결
고종19년 :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체결
고종20년 : 인천 개항, 감리서 설치
고종32년 : 인천부로 개편
경인 철도 개통
인천 이사청 설치
현대 1949
1968
1981
1989
1995
인천시로 개편
구 신설
인천직할시로 승격
김포군 계양면, 옹진군 영종면·용유면 편입
인천광역시로 개칭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 통합

인천의 면적

인천은 한반도 서해안의 중앙부 (동경 126도37분, 북위 37도28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14년 인천의 면적은 송림동, 창영동, 도원동 서쪽의 항만 지대에 한정된 6.05㎢였습니다. 그 후 1936년 10월 1차로 부천군 다주면과 문학면 일부를 편입했고, 1940년 4월 2차로 부천군 문학면등 4개면과 부평 일부를 편입했으며, 1963년 1월 3차로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는 작약도를 포함하여 면적은 166.32㎢로 늘어났습니다. 인천시가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에 1989년 1월 1일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 용유면을 편입했으면, 1995년 3월 1일에는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을 통합하여 2000년도 면적은 958.61㎢로 송도 신도시 건설, 공유수면 매립지 등으로 인천의 면적은 계속 넓어지고 있습니다.
인천의 면적 이미지

인천의 인구

인천은 개항(1883)당시에는 불과 4,700명 정도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949년에는 약 26만명이 되었고, 1960년에는 40만 명을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966년에는 50만명, 1980년에 100만명, 1987년에 150만명, 그리고 1992년 5월에는 200만명을 넘어서고, 1995년 3월 옹진, 강화등이 통합되어 현재 256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10년간(1991~2000) 평균 인구증 가율은 3.37%입니다.
인천의 인구 이미지 또한 인구밀도(㎢)는 2,673명으로 '99년말 2,634명보다 39명이 늘었습니다. 인천의 인구 증가는 남동공단 등 공업단지 조성과 택지 개발 및 대단위 아파트 신축으로 인한 인구 증가와 핵가족화에 따른 주거 생활 개선 욕구가 주요 원인이며, 수도권 지역중에서 비교적 집값이 저렴하고 서울로 출퇴근이 용이한 인천의 부평구 인구가 전년에 비하여 17,991명 증가로 가장 많이 증가하였습니다.
 
 
 
 
 
인천의 역사 (어른용)
 
지명 변천사
인천의 옛 지명은「미추홀」이란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삼국시대 백제 초기의 인천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을 때, 이미 「미추홀 」이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천은 원래 「미추홀」로 불려 오다가 그 후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미추홀(彌鄒忽)」은「인천(仁川)」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미추홀」이 곧 「인천」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미추홀 」은 백제 초기 비류가 건국한 비류백제의 도읍지이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건국설화에 의하면 주몽에게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형 비류는 현 인천에 비류백제(미추홀국)을 세웠고, 동생 온조는 현 「하남시(하남 위례성)」에 백제(십제)를 세운 것이다.
당시 비류백제의 수도는 현재의 문학산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나 흔적은 소멸되고 없다. 다만 문학산성 일대를 옛날 부터 「산성리 」라고 불러왔고, 비류의 능이라고 전해져 오던 왕능과 같은 큰 무덤이 청학동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온조의 백제(십제국)는 번성하고 백성들이 잘 살았으나 인천지역에 도읍에 비류백제(미추홀국)는 땅이 토박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기에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류가 세워서 다스리던 비류백제(미추홀국)는 뒤에 하남 위례성의 온조 백제와 합하게 되어(십제국을 백제라 하게 되었다고 함) 이때부터 미추홀 백성들은 백제의 백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천은 소래산을 비롯한 여러 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큰 평지가 없다. 문헌에는 "산과골짜기마다 갯물로 되어 땅이 거칠고 물이 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매소홀」이 "거치른 물의 고장"이란 뜻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추」와 「매소」는 한문 표기만 다르고 뜻은 같아서, 이 두 지명은 같은 뜻을 가진 토박이 말의 동음이자(同音異字)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토박이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미추홀의 '미(彌)'와 매소홀의 '매(買)'가, 대개 물[水]·내[川]·하천[泉]·강[河] 등의 뜻으로 해석됨을 알뿐이다. 또한「미추 홀」혹은「매소홀 」은 '바탕골'이란 뜻으로 한 나라의 도읍지임을 말해준다.
신라의 옛 도읍이「서라벌」이었듯이「미추홀」이 비류 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졸본(홀본-본골-바탕골)」도「밑골」의 이두식 표현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경덕와 16년(757년)에는 토박이 말로 되어 있던 지명들을 한자로 바꿨는데, 이때 부터 인천을「소성현(邵城縣)」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써서 신라의 제도와 관직 등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 말로 되어 있던 지명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고 9주 5소경 117군 293현을 정비하였는데, 이 때「매소홀현」이 「소성현」으로 바뀐 것이다.
  소성은 문학산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소(邵)'의 뜻은 "높다"로 산, 언덕, 혹은 황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성의 위치가 높아서 '소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귀족정치 시대에는 여러 벌족들이 등장하여 서로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벌족이 인주 이씨였고, 인주 이씨의 본거지가 인주 즉 인천이었기 때문에 인천은 몇차례 승격과 개칭을 겪게 된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부터는「경원군(慶源郡)」으로 불려졌다. 「경원군」은 경사의 근원이 되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통일 신라가 끝날 무렵 바다를 끼고 활동했던 인주 이씨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왕건은 인천, 강화 일대의 해상 세력에 힘입어 고려를 세웠으므로 고려 건국 후 인천은 크게 발전하였는데, 게다가 고려 왕실과 7대에 걸쳐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더욱 융성해진다.
인주 이씨가 왕실과 혼인을 맺은 것은 이 자연 때의 일인데 그의 세 딸이 차례로 문종 임금의 왕비가 되었다. 맏딸인 인예 순덕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의 세 임금과 대각국사 의천을 낳은 분이기도 하다.
인천은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순덕 태후의 친정 고을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친정이라는 이유로「경원군」으로 높여 불리게 되었던 것이며, 숙종은 수주에 속해 있던 소성을 독립시키고 부근의 땅까지 떼어서 인천을 큰 고을로 만들어 주었다.
그 뒤 인종조(1122-1146)에 이르러 경원군은 다시 인주로 낮춰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인천이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씨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순덕왕후는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의 둘째 딸로 예종 비가 되어 인종을 낳았다.
예종 9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예종 1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경태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이 자기의 외손자이며 동시에 사위이기도 한 인종을 폐하고 왕이 되려고 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여 인주 이씨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역사적으로는 이 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주 이씨의 몰락과 함계 번성해 가던 인천의 영화도 잠시 접어두게 된다. 그러나 고려 공양왕 2년(1390년)부터 고려가 멸망하기까지지, 인천은 다시「경원부」로 승격되어 불려지게 된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태자비를 인주 이씨 가문에서 맞아들이면서 사돈집인 인주(인천) 이씨 가문을 높여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공양왕은 인천에서 7명의 왕비가 배출되었으므로 "7대 어향"이라 일컫고 인천을 환대해 주었다.
인천은 7대 동안, 즉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가였고,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비의 친정이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조상을 숭상하는 의미에서 인천의 읍호를 경원부로 승격시켜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가 높여 놓았던「경원부」를 다시「인주」로 불려져 오게 되었다. 그러다 태종 13년(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군」이나「현」에 들어있는「주(州)」를「산(山)」이나「천(川)」으로 고쳤는데, 이 때「군」의 격을 가지던「인주」는 비로소「인천(仁川)」이란 읍호를 갖게 된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는데 목사가 수령인 고을과 군수 또는 현감이 수령인 고을에 모두 '주(州)가 붙어 있어서 고을의 등급을 알기에 혼란스러워 읍호를 정비를 하게 되었을 때. 인주의 주가 천으로 바뀌게 되어 인천으로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천군은 세조 6년(1460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고 남양부에 속해 있던 덕적과 대부등까지 인천에 포함되게 된다. 이것은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이며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진 외가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진 외가는 아버지의 외가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숙종 14년(1688년)에 인천 태생의 일개 중이 반역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인천도호부는「인천현」으로 낮춰져 불려지게 된다. 여환 등 11인의 중이 양주를 무대로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신령이라 칭하고 반역을 꾀하다가 잡혀 죽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인천」은 왕조와 관련성이나 가문의 번성 여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조선말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 후 1883년 인천항이 열리면서 조선말까지 인천의 변두리였던 조용한 포구 제물포는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변하게 된다. 또한 1914년에 일제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제물포 포구, 즉 지금의 동인천 일대 만을 인천부라 부르고 다른 지역은 새로 만든 부천군에 편입 시킴으로써, 한일 합방 이후 인천군은 사라져 없어지게 된다. 그러던 인천이 1930년대 이후 옛 인천 도호부와 부평 도호부 일부분을 흡수하면서 넓어졌다.
  1981년에 직할시가 되었고 1989년에 계양면과 용유도, 영종도 등이 인천에 포함되었다. 그 후 서해안 시대를 맞아 1995년에 인천 광역시로 개편되면서 강화군, 검단, 옹진군 등에 속했던 여러 섬들이 합쳐져 한국의 제일 넓은 도시를 형성, 21세기에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개항이후 발자취
1413 10 15 조선 태종13년 인주에서 현 명칭인 인천군으로 변경
1883 01      인천, 제물포항, 일본인에 의해 개항
1884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 조성
1897 03      경인철도 부설(1990.11 준공) : 한국최초인천역,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부평역 신설
1900          홍예문 개착(신시가지와 동인천역을 연결하기 위해)
1906 11      인천(송림동배수지~노량진간)상수도 개통
1910 10      인천부 신설(지금의 중구청), 1985년까지 인천시청으로 사용
1911 06      인천항 제1선거공사(1918.10 준공) : 2중갑문식 선거
수면적 3만평, 4,500톤급 선박 3척 동시 접안
1935          인천항 제2선거공사 착공(1943년 중단)
1937 07      인천~수원간 협궤선(궤간 0.732m)부설 (1937.8 개통)
1950 09      UN군 인천상륙작전 실시
1954 04      인하공과대학 개교
1959 07      제물포역 신설
1963 06      송도유원지 개장
1964 05      경인복선화 공사 착공(1969.06 준공)
1966          인천항 제2선거공사 재개(1974.05 준공) : 내항 전면도크화
1967 05      경인고속도로 착공(1969.7 준공) : 최초의 고속도로
1968 01      구제 실시(중고, 동구, 남구, 북구)
1971 08      동암역 신설
1974 08      경인선 전철 개통
1979 03      인천공과대학 개교
1980 11      인천시 인구 100만 돌파
1981 07      인천시, 인천직할시로 승격
1984 10      송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개관
1985 02      남동공단 조성공사 착공
       12      화도진 복원
1989 01      영종도, 용유도와 계양면 일부 인천시 편입
       07      월미도 문화의 거리 조성
1990 05      인천시립박물관 신축
       09      인천~중국간 정기여객선 해방후 첫취항
1991 02      인천~목표간 서해안고속도로 착공
        04      구의회 개원
        07      시의회 개원
        11      경인전철복복선 착공
1992 05       인천시 인구 200만 돌파
       07       경인고속도로 확장(신월~부평)
       11       인천국제공항 착공
1993 07      도시철도 1호선 착공
       12       중국 천진시와 자매결연
1994 03      선인학원 시립화(시립인천대학교, 인천전문대학)
        06     서해안(인천~안산)및 제2경인(인천~광명)고속도로 개통
        09     송도해상신도시 착공
1995 01      인천광역시로 명칭 변경
        03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 인천광역시로 통합, 남구(남구.연수구), 북구(부평구, 계양구) 분구
1996 03      인천국제공항 명칭확정
        04      인천발전연구원 개원
1997 06      송도신도시에 미디어밸리 조성 결정
       10      인천방송 개국
       12      송도신도시에 테크노파크 조성 결정
1998 04      신용보증조합 설립
       12      세계인권선언 50주년 UN선정 [인천의 길]명명식
                (인천상륙작전기념관앞 도로)
 
인천의 연혁
최근 문학산과 주양산(일명 안남산)부근 및 만석동, 용현동, 경서동 주변의 해안지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인 석부(돌도끼), 석검 등의 각종 석기가 출토 되었으며, 금속병용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 지석총군이 문학동, 학익동, 주안동 등지에 잔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의 중간기와 금속병용 시대인 5천년~7천년 전부터 태고인이 이미 인천지역에 정착한 것이 발견되었다.
● 삼국시대 가장 융성한 나라는 인천을 차지해야 했다. 인천의 지명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백제건국의 전설에 따르면 백제시조 온조의 동복형인 비류가 오늘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 발상이다.
씨족사회를 거쳐 부족적인 사회연맹체가 형성되었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오르면 약 2천천2백년(기원전 221년)전 · 후 인천은 삼한의 전신인 진국의 북부였고 한무제가 위만조선의 후손인 석거를 토벌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4군을 설치하였던 기원전 180년의 인천은 이에 속했다.
그러나 서기 212년 북에는 고구려가 발흥하여 낙랑을 멸망시키고 남에는 백제가 번성하여 마한을 압박하게 됨에 따라 인천은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으로 오히려 토호 할거지역이 되었다.
그 후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고 대방군의의 고지를 공략하는 한편 북쪽 고구려의 남진기지인 평양을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케한 서기 270년경의 인천은 당시 신흥 백제의 북부에 속했다.
그러나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 공략을 당하여 패퇴하게되자 인천은 고구려의 남부를 이루고 매소홀현(일명 경원매소)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신흥신라가 융성하여 고구려를 토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인천은 신라의 영토로 되었으며 신라 경덕와(서기742~764)때에 매소홀을 소성이라 개칭하고 율율군령현은 1018년에 수주(부평)의 관할지로 바뀌었다가 1096년(숙종기)인예왕후 이씨의 고향이라고 해서 인주로 승칭하는 한편 지주사를 배치하였고 1390년(공양왕)에는 7대어항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 조선시대에 지금의 인천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 인천은 고려 초기에 이르러 모든 문물이 꽃을 피우는 전성기였다.
1392년(조선조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로 개칭되고 1413년(태종13년)에 비로소 현재의 이름인 인천군이 되었다. 이 시대의 인천 행정구역은 광범위 하였으니 동은 시흥, 북은 부천, 남은 안산 등 각 군과 접하였고, 서방 일대에는 강화만이 임하여 팔미, 영종, 덕적, 굴업, 선갑, 백아, 자연, 이포 등의 여러섬을 옹유했다.
군치읍은 현 인천시가로 부터 동방 4km 지점인 문학산 슭(인천 남구 관교동)에 위치하였다. 1940년에 부천군으로부터 편입된 현 부평을 중심으로 부내 서 관면 일대에는 본래 인천과 별도로 발전해 온 내력을 지니고 있다.
부내 서관면은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이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때에 '수주'로 고치는 한편 새로이 지주사를 배치하였다. 이 무렵에는 현재의 인천은 물론, 당시의 과천, 양천, 김포, 통진의 여러 현까지 이에 배속 시킴으로써 경기도내에서 가장 광대한 행정구역을 점유하였다.
그리고 의종 때는 안남도호부로, 고종 때는 주양도호부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선렬왕 때에는 '길주목'으로 승격되어 1310년(충선왕 3년)에 비로소 부평부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413년 (세종 20년)에 현령으로 되었다가 10년 뒤인 1448년에 다시 부로 환원되어 근세 개항으로 개화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 신 문물의 출발지에서 신 동북아 중심지로.. 개항 당시 인천은 부내 10개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1876년(고종 13년)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에 의하여 1883년(고종 20년)에 개항을 보게 됨으로써 원래 다소면에 속한 적막한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현 인천시)로 부치를 이전함에 있어 882년(고종 19년) 5월 26일 한국최초의 조약인 한미통상조약이 화도진 군영(현 화수동)에서 체결됨으로써 구미각국과 통상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천은 국제항으로서 또한, 현대 항만도시로서의 기틀과 문호가 열린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천에는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고 거류민단의 큰 집단이 이루어지는 등 신시가지를 제각기 마련함으로써 인천은 점차 일본, 미국, 중국인 등의 거리로 변해갔다.
개항과 때를 같이해서 정부에서는 인천항 감리서를 개설하고 부사로 겸임케하는 한편 계포리를 두고 경찰행정도 겸해왔다. 1895년(고종32년) 인천감찰부를 신설함과 동시에 감찰을 두게됨에 따라 감리서를 부활하여 실시해 오던 중 광무 10년에 이르러 인천부윤을 두게 되자 감리서를 폐지하였다.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나라가 개방되자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각국의 세력들이 침투해 오기 시작 했으며 이 때 일본은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종래의 인천 주재영사관을 이상청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융희4년)8월29일 치욕적인 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되면서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박탈당하게 되자 소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신관제에 의하여 이상청의 폐지되고 부행정기관으로서 인천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1914년 3월1일 지방자치제도 계획에 따른 부군, 면개발령으로 인천의 관할지역은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한정 축돼소되고 원인천과 부천이 통합하여 부천군이 되었으나 1936년에 와서 부천군이 다주면을 병합하여 부역을 확장하였으며, 4년 후인 1940년 4월에 재차 부천군 관할이던 문학, 남동, 부내, 서관 등의 4개면을 인천부로 편입하였다. 광복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인천부는 시로 개칭되고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9년 김포군 계양면,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등이 편입되었고 1995년 1월 1일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을 통합하여 전국 제일의 광역시가 되었다.

'나의공부방 > 추억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강화도/강화역사관  (0) 2008.12.19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0) 2008.12.14
작약도[물치섬]  (0) 2008.10.04
인천의 옛모습  (0) 2008.10.04
인천의 문화재  (0) 2008.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