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공부방/추억의자료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재누리 2008. 12. 14. 22:20

추억속으로 :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도국산에 달동네가 생기기까지



위 내용은 송현동 달동네의 형성 배경을 적은 귀중한 기록이다.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잃고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로 찾아 들었다.
비탈진 소나무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였다.
이어 한국전쟁(6.25)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으며,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181,500㎡(5만5천여평)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수도국산(水道局山) 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다.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 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송림산은 산언덕 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송현(松峴, 솔 고개)동, 송림(松林, 소나무 숲)동의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 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 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 보가 큰 고민이었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 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 은 이 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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