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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재누리 2008. 10. 4. 19:03

질문자인사 ㄳ합니다 하지만 퍼온것이라서 좀 그럭저럭 하네요 이렇게 말해서 ㅈㅅ

개통 당시 인천     

과 남동면·부내면(富內面, 부평 구읍)·서곶면 등 4래 면이 인천부(仁川府)에 편입됨으로써 옛 부평의 대부분 지역이 인천부(仁川府)로 편입되게 되었다. 광복(光復) 수 1973년 소사읍(素 邑)이 부천시(富川市)로 승격됨에 따라 부천군(富川郡)은 없어지고 부천군에 속하였던 각 면은 김포군·시흥군·웅진군·등에 편입이 되었다.

 

 

현재의 인천 모습

 

공업도시로서의 비약적 발전

 

미래의 신도시 인천드림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가 실시됨에 따라 인천부는 시(市)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에는 부천군의 작약도(芍藥島)가 인천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3월 구제도(區制島)가 실시됨에 따라 1968년 1월 1일을 기하여 인천시에는 중구·동구·남구·북구의 4개 구가 설치 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 1월 1일 서구·남동구가 증설되어 6개구가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에는 김포군 계양면(桂陽面)과 옹진군 용유면(龍流面)·영종면(永宗面)이 편입됨으로써 인천직할시의 면적이 338.83㎢에 이르게 되었다.

 

자료: 인천광역시 통계연보, 2000

인천역사 간략보기

 

고대

신석기시대의 중간기인 금속 병용기에 사람이 산 것으로 추정됨(인천 각 지방의 고인돌문학산, 계양산에서 각종 석기들을 발견)

산국시대 백제를 세운 비류(沸流)가 문학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彌鄒忽)이라 부른것이 처음. (옹진 : 고구려의 옹천, 부진이(浮珍伊) · 강화 : 참성단, 삼랑성, 고구려혈구군(穴口郡) 설치)

미추홀이 치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때

고구려(475)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유역 미추홀 지역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매소홀현을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 율진군(栗珍君 : 현, 과천)에 속함. (부평 : 장제군(長堤郡, 옹진 : 폭지군(瀑池君), 강화 :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 원성왕 6년 혈구진설치)

고려

고려 현종 9년(1018) 소성현이 수주(樹州) : <현 부평>에 소속됨. 숙종조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

인종조에(1122~1146) 이르러서 다시 인주(仁州)로 개칭

(부평 : 수주로 개칭(940).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 설치,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로 개칭, 충렬왕 34년(1308)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 · 옹진 : 태조 23년(940) 옹천을 온진(饔津)으로 개칭, 백령진 설치 · 강화 : 태조 23년 강화로 개칭, 현을 둠(995), 고종 19년(1232) 강화천도군으로 승격, 우왕 3년(1377) 강화부로 승격)

공양왕 2년(1390)에 7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 (옹진 : 백령진 혁파, 강화 : 유수부로 승격)

조선

조선왕조 태조 1년(1392)에 인주(仁州)로 변경(옹진 : 태조 6년 옹진현에 진 설치)

태조 13년(1413)에 군(郡)이나 현(縣)에 주(州)자가 들어있는 곳은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게 되어 인천군(仁川郡)으로 재편하므로서 '인천'이라는 말이 등장. (부평 : 부평도호부 설치. 옹진 : 병마사 현령 겸임, 세종 5년(1423)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변경. 강화 : 강화도호부로 개칭)

세조 6년(1460)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

(강화 : 인조 5년(1627)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로 승격)

숙종 14년(1688) 현으로 변경

숙종 24년(1698) 도호부로 복구

(옹진 : 숙종 45년(1719), 황해수영 설치, 옹진현-도호부로 승격)

근현대

고종 12년(1875) 운양호(雲楊號)사건

강화 :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강화성 함락.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搖), 고종 11년(1812) 강화포대 설치,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체결.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 · 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체결

고종 20년(1883) 1월에 개항함으로써 통상 사무를 권장하기 위한 감리서(監理署) 설치.

1885년 감리서 폐지되면서 인천부(仁川府)로 개편.

(부평 : 인천부에 속함, 옹진 :해주부 옹진군 강령군으로 개편 황해도로 이속)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

(부평 : 경기도 부평군으로 개편, 강화 : 건양1년 강화부로 변경)

1899년 국내 최초의 경인철도 개통

1906년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설치로 인천부윤이 감리사로 직무 수행. (부평 : 부천군에 편입(1914). 옹진 : 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1909). 백령도 장연군에 편입(1914). 강화 : 강화군으로 변경(1906), 교동군 편입(1914)

1936년 일차로 부역 확장으로 부천군의 다주면과 문학면 일부 편입.

1940년 일차로 부역 확장으로 부천군의 다주면과 문학면 일부 편입.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편(옹진 : 벽석군 일부외 백령도 편입(1945) 1949년 경기도로 이속(1949) 편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1963년 부천군 작약도 편입.

(옹진 : 백령면 대청출장소 설치(1962), 부천군 도서 6개면 편입(1973), 대청면 신설(1974). 강화 : 강화읍으로 승격(1974)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

(옹진 : 자월면 신설(1983) · 강화 : 양오리 송해면 편입(1983))

1989년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편입.

1995년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 편입으로 광역시로 개칭

면적이 958.01km로 3.56배가 늘어서 현재 서울보다 면적이 1.5배가 된다.

 인천역사 시대별 변천과정

 

시대

연대

지명

비고

백제

 

미추홀(彌 鄒 忽)

백제 비류왕이 도읍

고구려

 

매소홀(買 召 忽)

고구려 장수왕 한강유역 진출

통일신라

757

소성현(邵 城 縣 )

경덕왕 16년에 통일신라의 제도
관직의 한화정책(漢化政策)

고려

1018
1095 ~ 1105
1122 ~ 1146
1390

수주(樹州)
경원군(慶 源 郡 )
인주(仁州 )
경원부(慶 源 府 )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
인예순덕태후이씨의 고향
인종의 어머니 순덕태후이씨의 고향
공양왕 2년 인천이 7대에 걸쳐 왕의
외가 또는 왕비의 고향인 칠대어향

조선

1392
1413

 

1460
1688
1698

인주(仁州 )
인천군(仁 川 郡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
인천현(仁 川 府 )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
태종 13년 지방제도 개편
인천이라는 고을 명칭이 처음 등장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고향
숙종14년의 여환등 11인의 역모사건
역모사건의 10년 경과후 환원

근대

1895

인천부 (仁 川 府 )

행정개편

현대

1949
1981
1995

인천시(仁 川 市 )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 )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

행정개편
행정개편
행정개편

 

 

또다른것^^

 

인천의 옛날모습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 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100년전 인천을 소개합니다.
이 사진은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로스가 촬영한 것입니다. 100년전 인천의 명칭은 제물포였습니다.



다음은 교보문고가 출간한 조지로스의 사진집 '호주 사진가의 눈을 통해 본 한국 1904 Korea throuth Australian eyes' 라는 책에 나오는 위 사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글 캡션은 출간 당시 붙인 것이고 영문 캡션은 로지 로스의 캡션 원문입니다.

썰물 때의 제물포 시와 항구 풍경. 사진에 보이는 거리를 경계로 일본인 거주지와 중국인 거주지가 구분된다.
길 오른쪽을 보면 광둥에서 온 제화공인 ‘푹 리’와 재단사이자 양복장이인 ‘렁 키’라는 중국 상인의 간판이 영어로 쓰여져 있다. ‘렁 키’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 아래쪽으로 또 다른 중국 가게인 ‘콩 리 상회’의 간판도 보인다. 길 왼쪽에 두 명의 일본 여잉ㄴ이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저 멀리 다른 일본인들도 보이는데, 그 옆으로 한국인 일꾼이 지게에 짐을 싣고 따라간다. 잘 차려입은 한국인들은 아마 상인인 듯하다.
크고 작은 한국 배들이 개펄에 정박해 있거나 닻을 내리고 있다. 바다 멀리 하나 혹은 두 개의 돛을 단 배들이 떠 있고 증기선도 몇 척 보인다. 길 양쪽을 따라 광고 간판은 물론 전화선과 전기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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