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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역사관은 강화도에 위치한 각종 전적지와 유적을 둘러보는데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역사관은 1988년 9월 문을 연 곳으로 강화와 인천의 역사를 시대별로구분해 꾸며 놓았다. -선사·통일시대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 등 모두 4개의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쟁과 관련된 유물등이 전시돼 있다. 1. 제 1 전시실: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선조들의 생활흔적이 전시되고 있다.돌도끼,돌칼.유문토기,지석묘등을 볼 수 있다. 2. 제 2 전시실: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전시실. 팔만대장경 제작과정이 생생히 기록돼 있고 그외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3. 제 3 전시실:북방민족 침략사를 볼 수 있는 전시실로 몽고침입에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국난극복사를 볼 수 있다. 4. 제 4 전시실 :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강화도 조약 체결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면서 3.1운동이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이 전시돼 있다.
강화대교 건너 왼편에 강화역사관이 있다. 역사관에서 해안순환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이 나온다.
목, 금, 토, 일 4일간은 문화유산해설사가 설명을 해준다.
5개소 일괄관람권 (역사관ㆍ고려궁지ㆍ덕진진ㆍ초지진ㆍ광성보) 청소년 : ㆍ개인 - 1,700 ㆍ단체 - 1,300 ㅣ 어른 : ㆍ개인 - 2,700 ㆍ단체 - 2,000
** 가는 길
● 강화대교를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몽정파크, 만수장 앞에 있는 도로 아래 굴을 지나 왼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
● 검문소를지나자 마자 좌회전해도 되나, 반드시 좌회전 신호를 따라좌회전
● 강화읍에서 강화대교 쪽으로 갈 때는 검문소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 선원사지에서 갈 때는 동쪽으로 2.1Km 진행하여 만나는 해안도로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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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비석군> 총 67기의 강화비석군이 있는데 조선시대 때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군수 등의 영세불망비와 선정비, 그리고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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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동종> 이 종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37년(1711) 강화유수(江華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주조(鑄造)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 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乳廓)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옆띠를 돌려 구연대(口緣帶)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鑄鐘) 관계와 개주(改鑄)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종각(鐘閣)은 260여년전에 강화성(江華城)의 남문(南門) 동쪽에 건립하였던 것을 강화국방유적(江華國防遺蹟) 복원정화사업(復元淨化事業)과 함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존(保存)하고 있다.
총중량이 3,912kg에 높이가 198cm이고 구경(口徑)이 138cm에 달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巨鐘)에 속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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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갑곶리의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제78호 >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도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4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4.2m, 지상부의 줄기 둘레는 2.12m이다. 3갈래로 갈라졌으며 가슴높이의 지름은 10㎝, 14㎝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7.9m, 남북으로 8.3m이다. 운향과의 낙엽관목이며 3m 정도 자란다. 가지는 다소 편평하며 녹색이고 길이 3-5㎝의 굳센 가시가 있다. 잎은 호생(互生)하며 3출엽(出葉)이고 엽병(葉柄)에 날개가 있다. 소엽(小葉)은 두껍고 도란형 내지 타원형이며 끝이 둔하거나 파지고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희며 꽃받침잎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많으며 자방에 털이 있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3㎝정도로서 향기가 좋으나 먹을 수 없고 약용으로 한다. 묘목은 귤나무의 태목(台木)으로 하고 성목(成木)은 남쪽에 있어서 산울타리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나무의 유래(由來)는 몽고군이 침공하였을 때 고려의 고종(高宗)께서 28년간 강화에서 정무(政務)를 살피셨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의 가족이 강화도에서 전란을 피하였다. 이러한 전란(戰亂)을 계기로 하여 성(城)을 튼튼히 쌓고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성(城) 밑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한다. 성(城)은 무너져 없어졌으나 그 밑에서 적병(敵兵)의 발뿌리를 노리던 탱자나무의 일부는 남아있다. 따라서 국토방위(國土防衛)의 유물(遺物)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북쪽의 한계지(限界地)이다. 여기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힘쓴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직접 볼 수 있게 한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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