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공부방/추억의자료

수인역 이야기

재누리 2013. 3. 29. 19:55

 

  
기차는 두시에 떠나네

시야에서 사라지는 열차의 끝을 보면 슬프다.

내 사람, 내 물건을 싣고 가는 것도 아닌데 아득한 곳으로 기차를 떠나보내고 나면 공허함이 몰려온다.

수인역에 가면 마치 등 굽은 노인네 같은 노쇠한 철길 때문에 슬프다.

수인역은 도심 후미진 곳에 물러나 있다.

아파트에 가려져 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어 이제 그 존재감은 없다.

역 이름도 희미해지고 역사(驛舍)는 아예 사라졌지만 아직 철길은 살아있다.

철길 따라 사람들도 살아있다.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으로 철길과 마을이 사이좋게 공존하며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입영열차 출발지

 

수인역은 수원과 인천역을 오가던 수인선의 한 정거장이었다.

1948년에 세워진 옛 역사(驛舍)는 곡물시장 인근 지금의 화물주차장에 있었다.

요즘은 흔히 수인역하면 신광초등학교와 CJ 인천공장 사이를 말한다.
쇠락한 동네 수인역에 가면 애절한 음악들이 번갈아 귓가에 맴돈다.

가난한 철도원 가장의 삶을 그린 피에트로 제르미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철도원(Il Ferroviere, 1956).

슬픈멜로디가 내내 깔리는 이 주제 음악은 중간에 사이렌 소리와 투박한 아버지의 말투그리고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섞여 나오며 묘한 애틋함을 준다.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독일 나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청년을 떠나보낸 여인의 슬픈 노래로 첫 소절부터 가슴을 저미게 한다.

수인역이 슬픈 것은 무엇보다 이곳이 입영열차 정거장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말까지 수많은 ‘청춘’들은 이곳에서 출발하는 논산훈련소행 입영열차에 몸을 실었다.

 빡빡머리들은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눈물을 삼키며 열차를탔다.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애인과 이별의 키스를 하는 순간 열차는 야속하게 기적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용현동 동양화학 옆을 지나는 순간 호송관들의 살벌한 외침소리와 동시에 열차 안은 금방 군기 바짝 든 훈련소로 변했다.

 

 하루 10여 차례 화물차 통과

집들 사이로 난 기차 길을 보고 있노라면 기차가 먼저 길을 냈는지 마을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1937년 협궤열차 수인선이 건설되었고 철로는 정미소가 있던 수인역에닿았다.

기차가 서는 곳에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검은 연기 내뿜으며 달려온 기차는 역에 가까이 왔다고 ‘왝왝’ 거리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수원, 군자, 소래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이 키운 닭이며 각종 곡식을 이고 지고하며 수인역에 내려놓는다.

금방 큰 장이 서고 거래로 왁자지껄 소란해진다.

장이 서는 동안 열차 맨 앞 기관차는 거대한 회전기를 이용해 다시 수원 방향으로 놓여진 후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렇게 수인역은 번창했다.
1979년 종착역이 송도로 변하면서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제 수인역은 젊은 택시기사들은 그 위치를 잘 모를 정도로 도시의 뒷무대로 한발짝 물러 앉아있다.

지금은 농산물 대신 포항에서 실은 철강 코일과 강원도에서 실은시멘트와 석탄을 채운 화물차만이 하루에 10여 차례 지나간다.
기찻길 옆으로 보신탕 집이 늘어져 있다. 오후 두 시경, 한 숟가락 뜨려는 순간, 국물이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보신탕 국물이 열차가 오고 있는 것을 먼저 감지한 것이다. 이어 건널목 간수의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가게의 간판과 지붕 처마를 아슬하게 스치듯 동네 한가운데로 시커먼 열차가 꽉차게 들어온다.
수인역 마을에서 철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측으로 가면 인천역, 좌측으로 달리면 부두행이다.

하나 둘 셋…기차는 24개의 화물칸을 힘겹게 끌고 간다. 건널목을 지나가는데 2분 넘게 걸린다.

S자로 휜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의 모양이 마치 구렁이 같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일상인 듯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제 할일을 할 뿐이다.

 

 

 

명맥 이어가는 곡물상과 기름집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차 때문에 생긴 시장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사람들도 남아 있다.

곡물상과 고추집 그리고 기름 짜는 집 등 40여 개의 점포가 신광초교 담벼락에 기대어 ‘수인곡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의 한별아파트 자리에는 인천 최대의 농산물 깡시장이 있었고

이후 김치공장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개장하는 등 농산물과 관련된 시장이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는 연백상회, 개풍상회, 충남상회 등 고향을 가게 간판으로내건 곡물점이 주를 이르고 있다.
“예전만 못해. 대형마트 때문이야. 그냥 심심하니까 가게 문을 열고 있는 거지.”

충북 영동에서 올라와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 흥진상회 이영주(77) 할아버지는 “곡물이란 이름 붙은 곡식은 다 있고 다른데 보다 30% 정도는 싸다”고 설명하며 연신 소리쳐 참새떼를 쫓는다.

그나마 기름집들의 사정은 좀 나은 듯하다. 그것은 냄새로도 알 수 있다. 수

인역 인근에 가면 하루 종일 고소한냄새가 진동한다.

90년대 말 기름집 전성시대에는 기름집 옆에 있던 약국도 한켠에서 기름을 짤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약사회에서 현장에 나와 흰 가운입고 기름짜는 그 약사에게 약을 팔 건지, 름장사를 할 건지 선택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있다.

만수기름집, 대영기름집 등 40년 넘게 오래된 가게들은 이제 대를 이어 기름을 짜고 있다.

부모의 손길로 모서리가 닳아버린 되박, 깔대기, 함지박 등 기름 짜는 도구들을 아들이 이어 받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세월이 흘러도 옛맛 그대로 고소한 맛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인역 시장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가게가 또 한군데 있다.

47년 동안국수를 말아 온 골목국수집이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버거운 좁디좁은 골목에서시작한 이 가게는 시장 사람들과 부두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 주던 국수집이다.

장사가 잘 될 때는 밤에만 야식으로 100여 그릇씩 팔았다고 한다.

열차를 끌고 온 기관사가 잠시 기차를 세워놓고 이 집에서 요기를 해결할 정도였다.

이제는 골목에서 나와기차길 바로 옆 2층 건물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할머니는 국수를 말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철길 건너 시장통을 누비며 배달을 하신다. 오늘도 그렇게 수인역 철길에는 사람과 기차가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