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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사 곡절의 증인들 잠든 곳 외국인 묘지

재누리 2013. 2. 20. 22:56

개항사 곡절의 증인들 잠든 곳 외국인 묘지


중구 송월동에서 동구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육교로 인천역 구내 철길을 건너 만석동우체국 옆길을 따라가면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 옛 외국인 묘지 자리가 나온다.


외국인 묘지라니?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인천에 일본인 묘지, 중국인 묘지와 함께

서양 사람들만 묻히는 외국인 묘지가 있었다.





외국인 묘지는 애초 2만6천400㎡(8천여평)에 이르는 넓고 완만한 평지와 구릉을 가졌었는데,

묘역은 약 9천900㎡(3천평) 정도에 이르렀었다.

이 묘지는 인천 도심이 점차 확장되면서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그 후에도 묘역은 철도 부지로 잠식당해 지금은 담장 안에 고작 한 움큼쯤 되는 붉은 언덕과

죽은 아카시아 몇 그루만 한 맺힌 듯 이리저리 기울어지고 그을려져 있다.


외국인 묘지는 1883년 개항 이후, 주로 인천에 거주하다

사망한 서양 상인, 선교사, 외교관 가족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조성된 묘지였다.

묘비에는 인천사(仁川史)에도 등장하는 친숙한 이름들이 보이는데,

특히 상인 월터 타운센드, 헤르만 헹켈, 의사 랜디스 박사, 청국 외교관이었던 오례당 같은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영화 같은데서 보던 그대로 묘역 안에는 십자가나 방패, 혹은 탑 형상의 가지각색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공원처럼 주위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제법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인적도 없고 바람소리만 들리던 야트막한 구릉 위에 돌담이 성곽처럼 둘러 쳐진 묘역은,

언뜻 보기에 무슨 동화 속 나라 같았다.


사진은 북성동에서 이장한 그대로 청학동 동부아파트 근처의 외국인 묘지 풍경이다.

1965년 이리로 이전할 때는 시 외곽 변두리였는데 이제 다시 아파트 촌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꼴이 되어 더욱 답답할 듯싶다.

옛 송도역에서 연수동 방향으로 청학동 언덕을 내려서면서 첫 사거리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간다.


바다 가까운 곳에서 좀 더 육지 깊숙이 자리를 옮긴 것을 빼고는 북성동 묘지나 청학동 묘지나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그 사연은 일일이 알 수 없으나,

처음 묘지를 바닷가에 썼던 것은 언제고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묻히리라는 원망(願望) 때문이었을 텐데, 이제는 그 꿈도 더 멀어진 것이 아닌지….


아무튼 우리 인천은 이런 자산-이런 말을 지하의 영혼들이 혹 언짢아 할지 모르지만-이라면 자산을 가지고 있다.

이 무슨 말이냐 하면, 외국인 묘지는 우리 인천 개항사(開港史)의 곡절의 한 증인이자

그 현장으로서 요긴한 역사적 자산이라는 의미다.

또 한편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 독특한 이국 풍정, 이방지대 하나가 가꾸기에 따라서는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1997년 IMF 때 관리인이 감원되고, 그 후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담 한 쪽은 무너지고, 그 통행을 막기 위해 얼기설기 해놓은 꼴이나, 통로는 쌓인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지고,

묘비는 풍설에 마모되고 떨어져 나가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이래서는 안된다. 역사의 진실, 공과(功過)는 뒤로 미루더라도, 이 묘역은 그냥 우리에게 의미있는

 한 편의 ‘인천 시(仁川詩)’가 될 수 있을 터!


“1960년 나른한 봄날, 중1이었던 우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북성동 외국인 묘지의 돌담을 넘었다.

지금도 바닷바람에 섞여 묘역 전체에서 풍기던 그 사무치는 듯한 고요를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