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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팔경(仁川八景)|

재누리 2013. 3. 3. 09:11

우리나라에는 ‘○○팔경’이라고 해 전국 곳곳에 팔경(八景)이 분포돼 있다. 이 팔경은 팔경시(八景詩)에서 유래된 것인데 팔경시(八景詩)는 중국 양대(梁代)의 심약(沈約, 441∼513)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팔경시는 11세기인 송대(宋代)에 이르러 소상강(瀟湘江) 일대의 승경(勝景)을 팔경으로 집약하면서 일반화된 시(詩)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나라에 팔경시가 언제 전래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고려 명종 때 왕명에 의해 신하들이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짓고,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보편화된 듯하다.
소상팔경은 ‘평사낙안(平沙落雁 : 평평한 모래 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원포귀범(遠浦歸帆 :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산시청람(山市晴嵐 : 산마을의 맑은 산 아지랑이)’, ‘강천모설(江天暮雪 : 강과 하늘에 내리는 저녁 눈)’, ‘동정추월(洞庭秋月 : 동정호의 가을 달)’, ‘소상야우(瀟湘夜雨 : 소상강에 내리는 밤 비)’, ‘연사만종(煙寺晩鐘 :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漁村夕照 : 어촌의 저녁 노을)인데 우리나라 팔경시의 전형이 된다.

   
 
이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지역별로 팔경을 설정하고 이를 한시(漢詩)로 읊는 관습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한시 위주였던 팔경시에서 벗어나 시조나 가사에까지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정도로 성행했다. 
우리나라의 팔경시는 주로 그 지역출신 문인이나 부임한 관리들에 의해 그 지역의 승경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창작이 되는데, 관동팔경(關東八景)이나 단양팔경(丹陽八景)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에도 여러 개의 팔경이 전해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호구낙조(虎口落照) 호구포의 저녁 노을
   팔미귀범(八尾歸帆) 팔미도를 돌아드는 돛단배
   옥구어적(玉龜漁笛) 옥기섬 어부들의 피리소리
   장도단풍(獐島丹楓) 장도의 단풍
   계관암화(鷄冠岩花) 계관섬의 기암
   문학청람(文鶴晴嵐) 문학산의 맑은 산 아지랑이
   청룡부운(靑龍浮雲) 청룡이 구름위로 승천하는 모습
   오봉명월(五峯明月) 오봉산의 밝은 달

② 성당만종(聖堂晩鐘) 성당의 저녁 종소리 
   주안낙안(朱安落雁) 주안에 내려앉는 기러기
   사도석우(沙島夕雨) 사도의 밤비
   영종귀범(永宗歸帆) 영종을 돌아드는 돛단배
   화도청람(花島晴嵐) 화도의 맑은 산 아지랑이
   월미추월(月尾秋月) 월미도의 가을 달
   묘도석조(猫島夕照) 묘도의 저녁 노을
   응봉모설(鷹峰暮雪) 응봉산의 저녁 눈

③ 한강석조경(漢江夕照傾)   한강의 비낀 저녁 노을
  천주만종명(天主晩鐘鳴)    천주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송림추월영(松林秋月迎)   송림에서 맞이하는 가을 달
  염하락안락(鹽河落雁落)   염하에 내려앉는 기러기
  영종청람명(永宗晴嵐明)   영종의 맑은 산아지랑이
  월미귀범평(月尾歸帆平)   월미도를 돌아드는 돛단배
  계양모설청(桂陽暮雪淸)   계양산의 깨끗한 저녁 눈
  응봉야우성(鷹峰夜雨聲)   응봉산에서 들리는 밤비 소리

①은 인천팔경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다. ‘호구낙조’의 호구는 현재 남동구의 논현동에 있는 곳이고

   
 
, ‘팔미귀범’의 팔미도는 현재 중구에 속해 있지만 남동구에서 보이는 섬이다. 그리고 ‘옥구어적’의 옥구는 남동구의 고잔동에 있는 옥기섬을 말하며, ‘장도단풍’은 장도도 남동에 있었던 장도의 아름다운 단풍을 뜻한다. 또한 ‘계관암화’에서 계관은 남동 앞바다에 있는 계관섬을, ‘오봉명월’은 남동구에 있는 오봉산을 말한다. ‘문학청람’은 문학산을 ‘청룡부운’의 청룡은 현재 남구 용현동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로 보면 ①의 인천팔경은 현재의 남동구와 문학산 주변의 풍경을 위주로 지정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동구와 문학산 주변의 풍경을 위주로 인천팔경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지정 당시 인천의 중심 무대가 문학산 부근이었음을 의미한다. 문학산 부근이 인천의 중심지였던 때는 인천도호부가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 팔경은 조선시대에 지정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②는 <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자에도 실린 것으로 소상팔경의 체제를 그대로 따온 전형적인 팔경이다. ‘성당만종’의 성당은 답동성당을 지칭하고, ‘사도석우’는 사도는 지금은 매립됐지만 신포동 남쪽 해안에 있었던 섬이다. ‘영종귀범’의 영종은 영종도를 말하고, ‘화도청람’의 화도는 현재의 동구에 있던 섬이고, ‘월미추월’의 월미는 월미도를 말한다. ‘묘도석조’는 괭이부리라고도 하는 동구의 묘도를 말하며, ‘응봉모설’의 응봉은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주안낙안’의 주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재의 중구 또는 동구의 일원이다. 중·동구가 인천의 중심지였던 시기는 개항 이후이므로 ②의 인천팔경은 개항 이후에 지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③은 20세기 초 일본인 후지노 기미야마(藤野 君山)에 의해 창작된 한시 형태의 인천팔경이다. 20세기 초 인천의 중심지는 중구였다. 그러므로 ③의 인천팔경을 보면 팔경(八景) 중 ‘천주만종명’의 천주가 답동성당을 지칭하는 등 송림, 영종, 월미, 응봉 등 무려 오경(五景)이 현재의 중·동구에 해당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포의 한강변과 강화의 염하 그리고 계양산까지 넣어서 팔경을 지정했기에 인천팔경 중에는 가장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에도 인천에는 용유팔경, 영종팔경, 강화팔경 등 작은 단위의 팔경들도 다수 전해진다. 이는 인천에 승경지(勝景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천시민들조차도 인천에 팔경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그 동안 인천이 매립과 개발을 통해 상당한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매립과 개발이 되면서 기존의 팔경 중 상당수가 유실돼 팔경으로서의 기능을 못했기에 자연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또한 기존에 지정된 팔경이 인천팔경이라고는 하지만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지정이 됐기에 인천을 대표할 만 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된다.
   
 


흔히 ‘인천에는 볼 것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인천의 관광자원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경은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 상황에 적합하면서 인천을 아우르는 인천팔경을 새롭게 지정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