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딱지처럼 보여도 | ||
9번지 골목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단옥선할머니(79)는 만석동으로 피난 내려와서 처음 집을 짓던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단할머니가 피난 내려올 당시에 만석동 9번지 일대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피난 내려온 사람들은 그 산을 깎아 손수 대들보를 올리고, 흙을 개어 벽을 발라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10여 평 안팎으로 각자 필요한 만큼씩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주보고 늘어선 작고 낮은 집 9번지 골목은 두 사람이 간신히 비껴 지나 갈 수 있을 만한 폭으로, 길 양쪽으로는 작고 낮은 집들이 서로 마주보고 늘어서 있다. 50여 년 전에 지어진 집들은 옆집과 흙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기대어 있고, 두 집이 한 지붕 밑에 나란히 있는 경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슬레이트로 얹은 지붕 위에는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올린 블록이며, 나무 막대 등이 보인다. 골목 전체가 작은 방들이 모인 하나의 집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의 생활도 특별한 경계 없이 문을 열어 놓은 채 지낸다. 사람들은 열린 문을 통해 안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9번지 골목에 사는 한 할머니는 "굳이 문을 닫을 필요가 뭐가 있겠나.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인데"하고 말한다. 만석동은 주변에 한국유리, 동일방직, 대우중공업 등의 공장과 부두가 있어 일자리가 많았다.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만석동으로 많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9번지 골목의 집들은 2층으로 다락방을 올려 골목에는 150여 세대가 모여 살기도 했다. 당시 골목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풍경 중 하나가 사람들이 둘러앉아 마늘이나 굴을 까는 모습이다. 한 집에서 마늘이나 굴을 까면 이웃들이 마실 왔다가 자연스럽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일을 돕는다. 일을 하다 밥 때가 되면 사람들은 평상시 먹는 밥상에 수저 하나 더 얹어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질퍽질퍽했던 골목길 또한 "만석동에서는 집사람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던 길에 보도블록을 설치한 것도 골목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단할머니는 "보도블록을 사는 일부터 땅을 파고 공사를 하는 것까지 모두 동네 사람들이 했다"며 "공사를 하고 난 다음에 다시 뜯는 일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9번지 골목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일터가 되고, 불편을 덜기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하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람들'로 만날 수 있었다. 9번지에 사는 할머니들은 "그때는 그렇게 많이 살았어도 싸우는 법이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 9번지 골목에는 사람들이 이사를 떠나고 빈집들이 늘어나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조차 별로 없다. "요즘 이런 동네가 어디 있나. 이게 다 우리네가 살아온 역사인데. 우리같은 늙은이들이 떠나면 동네가 사라지겠지"고 하는 단할머니의 말 속에는 손수 지은 집과 사람들이 함께 닦은 길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쌓인 정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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