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 달라붙어 | ||
박상규할아버지(81)는 북해안선(인천역∼인천제철)이 만석동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보다도 먼저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큰 화물을 운반할 수단이 배와 기차가 전부였기 때문에 북해안선은 그 후로도 인천항(현 인천역 뒤쪽)과 만석동 주변에 있는 공장들 사이를 오가며 화물을 운반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당시에 북해안선 기차로 운반되는 화물은 주로 석탄이었는데, 이것은 만석동 사람들에게 중요한 땔감이 되기도 했다. 박할아버지는 "그 때는 석탄 실은 기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새까맣게 기차에 달라붙었어. 사람마다 자루를 들고 기차 방통(화물칸)에 뛰어올라가서는 석탄을 한 자루씩 걸머지고 뛰어내리곤 했지"하며 "지금 사람들이야 도둑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어. 전쟁 나고 없이 살던 시절에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으니까"하고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해안선 철길 옆으로는 1·4후퇴 때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작은 판자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판자집들은 차츰 늘어 철길 옆, 43번지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무영(46)씨는 피난 내려온 부모님이 철길 옆에 지은 집에서 40여 년을 살고있다. 이씨는 "내가 어릴 적에는 이 기차가 인천제철로 다녔는데, 하루에 한 서 너번은 다닌 것 같아요. 그 때는 기차가 지나가면 집이 덜덜덜 떨리고 그랬죠"하고 기차가 지나가던 때를 기억한다. 이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 북해안선은 인천제철과 동국제강 등으로 고철을 운반하거나 기차 레일이나 철판 같은 생산품을 운반하는 데 이용되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고철을 얻기 위해 달리는 기차에 뛰어오르는 일이 많이 있었다. 이씨는 "그 때는 기차가 지날 때면 동네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놀다가도 달려와서 기차에 올라타곤 했어요. 기차에 싣고 다니던 고철 몇 개만 있으면 엿도 바꿔먹고 그럴 수 있었거든요"하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달리는 기차에 오르내리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큰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해안선은 그 뒤로도 20여 년 동안 운행되다가 점점 운행횟수가 줄어들면서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 동안 도로가 확장되고 만석신고가 도로가 생기면서 화물운반이 기차에서 대형트럭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기차의 운행이 줄어들자 철길은 아이들이 자주 가는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철길에서 벌레를 잡기도 하고, 여름이면 철길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똥바다'에 내려가 수영을 하고 놀기도 했다. 기차의 운행이 중단된 3∼4년 전부터 북해안선 철길의 일부 구간은 쓰레기나 폐기물들이 버려진 채 방치되어 주변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동네의 노인들은 철길 사이사이로 드러난 흙에 고추며, 상추 따위를 키우기 시작해 몇 년 동안 철길 곳곳에 작은 밭을 일구기도 했다. 북해안선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굴막에서 굴을 까는 아주머니들이며, 그물을 손질하는 아저씨, 철길 옆 작은 밭을 손질하는 노인들 등 만석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인천시에서는 올해 상반기에 북해안선 철길을 철거하고 도로를 더 넓힐 예정이다. 철길이 철거되면 만석동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흔적이 하나 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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