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공부방/추억의자료

김순남 할머니(69세) 순창에서 만석동 올라오던 이야기

재누리 2013. 2. 19. 22:03

“ 막내업고 큰딸 손 꼭쥐고
밤기차 타고 올라왔제.”

김순남 할머니(69세) 순창에서 만석동 올라오던 이야기

.

내 고향이 전남 담양이고 시댁이 전북 순창이여. 순창으로 내 나이 열 아홉에 시집와서 11년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는가.
거 시댁이 섬진강 있지 않는가. 우리는 남원 대강면이라고 곡성 가차운 물가서 살았제.
거 5년 전에 한번 가보니 개발허고 전기로 물끌어다 농사짓고 양어장 만든다고 파헤쳐서 많이 더러워졌드먼. 그때는 물이 진짜로 맑고 자갈도 모래도 많고 민물고동도 많았는디 말여.
거그선 우리 애 아버지허고 내내 농사만 졌제. 져봐야 논농사 조금허고 밭농사라곤 콩이랑 목화 조금 심어했는디. 맨 남의 땅 농사니 매년 빚만 늘었제. 거 일년내 농사진 걸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응게. 빚 갚는건 엄두도 못내고 말여.
그리 살다보니 빚만 늘고 암만 생각해도 시골서 있으면 애들 머슴살이뿐이 못시키겠단 말여.
하루는 애 아버지가 이리는 못 살겠다고 하더구먼. 그러더니 서울가서 돈을 벌어보겠다고 식구들 놔두고 먼저 올라가버린거 아녀.
애 아버지가 막상 올라간다고 집을 나서는데 좀 서운킨 했지만 어쨌든 애들 공부라도 시키고 살려면 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꾹 참았제. 어떻게든 도시로 가면 시골서 고생하는거보단 나을거라고 생각했응께.
그라고 한 일곱달인가 있다가 애들허고 나도 여그로 올라오게 되았는디. 거 밤기차 있지 않은가. 그걸 타고 올라왔제. 막내아들 등에 업고 큰 딸 손 꼭쥐고 4남매를 데리고 차 안에서 애들이라도 잃어버릴까 조마조마하면서 말여.
짐이라곤 이불 몇 개랑 애덜 옷가지 조금이었제. 떠날때 맴은 올라가서 새로 시작한다는 맴이었으니 집에 세간살이는 다 두고 말여.
맨 처음 여그와서 동네를 보니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있고 무엇보다 일거리가 많응께 그것이 참 좋드먼. 농사와 달리 하루 벌면 바로 돈이 생기니 말여. 첨에 올라와선 애 아버지가 거 하역장에 가데기 지러 다녔는디 그 양반 죽기 전까지 그 일만 했구먼.
올라와 집구허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제. 애덜이 많으니 누가 세를 줄라고 하냐말여. 애 아버지가 요 아래(6번지 공중화장실 옆) 국수집서 하루에 30원씩 주고 살고 있었는디. 그 옆에 어렵게 일년에 7000원 받는 집을 구해 살었구먼.
일거리는 있어도 올라와서 보니 어디 아는 사람들이 있는가 친척이 있는가. 당장 돈이 없으니 여섯식구 하루 먹을라면 달리 외상으로 먹는 수 밖에 없는디 말여. 그래 노냥 그 애 아버지 있던 국수집서 국수를 외상으로 얻어다 애들하고 먹었는디. 지금 생각하면 서럽구먼.
내중에 거 송화상회 아저씨 거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 아저씨가 우리가 딱해 보였던지 그 집서 쌀을 외상으로 대 줄테니 먹으라 하더구먼. 얼매나 고마웠는지 몰러. 모르는 사람헌티 그러기 쉽지 않응께. 그래 내 그 아저씨 이사가기 전까진 노냥 그집서 쌀 팔아 줬구먼.
내중에 애들을 둘 더 낳으니 우리 식구가 여덟 식구가 되았는디. 거 예전 혼합곡 있잖여. 그걸 한달에 120키로씩이나 먹었지 않았는가.
그래 한 2년쯤 그 집서 살다가 지금 여그(9번지 화장실 옆)로 이살 왔는디. 그때 3만9000원인가 주고 이집을 사서왔제. 여그서 6남매 다 키워서는 아들 덜 대학도 보내고 그랬제.
집이 작아서 이사와서는 다락을 올렸는데 다락에 세명 아래에 다섯명 그렇게 자면서 살았구먼.
애덜 학교 다니고 헐때는 아침마다 징글맞게 도시락도 많이 싸고 했구먼. 하루에 일곱 여덟 개씩 말여. 식구덜 바글바글하고 좁아서 고상은 많이 했어도 이집에 적잖이 정이 많이 들었제. 내나이 예순 아홉에 여그서 35년 살았응께 이 집서만 내 인생 반 넘게 산거아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여그 집들은 코딱지 맨치로 작아도 없는 사람들 살기는 젤 좋응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