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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할머니(72세, 만석동 9번지)의 ‘살아온 이야기’

재누리 2013. 2. 19. 22:01

"내 사는 이 골목은 30년동안
한치도 달라진 게 없어."

김근수 할머니(72세, 만석동 9번지)의 ‘살아온 이야기’

나 어릴 때? 고향? 거 통일이 되긴 되갔어? 되긴 뭐이가 돼, 통일 돼도 나 같은 늙은인 구경도 못하겠지. 고향도 많이 변했을텐데... 뭐 거기 땅이나 딛어보고 죽겠나 그 안에 다죽지.
내고향이 황해도 동강면이야. 위로 해주, 용당포라는 데가 있고 연백하고 강하나 두고 사이에 옹진이 있고 옹진 안에 우리 부락이 있지. 그 아래로는 소서읍 연평 뭐 이렇고 말여.
거 우리 살던 데가 해변가라 농사도 좀 짓고 고기 잡는 배들도 있고 그랬네.
고향 내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어. 뭐 동네 집들이 다 초가집이었지. 동네사람들이 가을이면 한해 건너 한번씩 다들 모여서는 집집마다 돌며 이엉(초가집의 지붕이나 담을 이기 위하여 엮은 짚)을 얹어. 거 테레비 보면 민속촌 나오는 그런 집들 있잖아. 그거랑 똑 같애. 이엉을 어떻게 얹냐하면 우선은 사람들이 모여서는 한 이틀을 이엉을 엮어. 꼭 동네 시래기 엮어서 걸어놓듯이 볏단이 이렇게 있으면 한 속씩 집어서 아주 길게 엮는 게야.
그러고는 그걸 이중삼중으로 둘러서는 지붕에 얹는게지. 한집 하는데 보통 삼일씩은 걸렸어.

초가집이 엉성해 보여도 그렇지 않아

이엉 대는 밑에는 흙을 두텁게 발라 놓는데 그게 다 비 새지 말라고 해논 게야. 그래서 초가집이 엉성해 보여도 한번 가서 보라구. 대들보랑 기둥이랑 다 굵지. 그 흙을 다 이겨내야 할거 아녀. 내 살던 집만 해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몇 대가 살았었구먼. 요즘 집들 어디 그리 오래 살 수 있는가.
6.25 터지구 1.4후퇴 때 강화로 피난 나왔어.그때가 내 나이 스물이었으니까 한 50년도 넘었구먼. 애아버지하고 나하고 그리고 우리 친정에 동기간 언니하고 그렇게 뿐인데 그나마 언니도 전쟁통에 죽지 않았겠어. 그래 우리 어머니도 우리가 모시고 피난 나왔었지. 강화에 와서 아들 하나를 낳고는 그렇게 네 식구가 함께 피난살이를 했지.
고향 버린 사람들이 피난 나와서 거 뭐해 먹고살겠나. 애 아버지가 뱃일을 했는데 비오고 바람불고 하면 사고가 나잖아. 시방은 무전기도 있고 전화도 있지만 그땐 그게 어디 있어. 애 아버지 죽은 것도 다른 사람한테 들어서 나중에야 알았구먼. 애 아버지 그래 죽고는 아들내미 외할머니한테 맡기고는 남의 집 밭매주고 보리베러 다니면서 먹고살았네 그려.
강화 와서 어디 마땅히 살 데가 있나. 겨울이면 아는 집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봄 되서 날이 따뜻해지면 움막 짓고 나와 살고 그랬네. 내 만석동 온 게 30년 되었는데, 예와서 하꼬방 하나를 얻었는데 강화서 움막 짓고 살던 생각하면 정말 좋은 집이었지. 그게 지금 사는 이 집이라네.내가 어머니를 강화에 묻고 만석동 들어올 때가 마흔 셋이었으니까 시방 말로 하면 한창때지. 에구 지금이야 이렇게 늙어 방구석에서 마늘이나 까며 살지만 그땐 조개도 잡으러 다니고 굴도 까고 한창 일 할 때 아닌감.

어머니 강화에 묻고 마흔 셋에 이곳에 왔지

이 손 봐봐(할머니의 손은 허물이 벗겨져 있었다). 요즘은 심장이 아파서 이렇게 약만 먹고 그나마 마늘도 못 까고 있으니 더 답답하네 그려. 이 동네 할머니들 보라구 한 몇 십 년 마늘 까고 굴 깐 사람들 다 나이 들어 골병들고 말았지.
내 사는 이 골목으로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달라진 게 없어.
우리 집 앞 철대문도 내 여기 올 때부터 있었던 거고 말여. 그 대문 색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밑에가 잘뚝하니 잘린 것도 사람들이 하도 댕기니 다 녹슬어 그런 게야. 어이 이거 봐봐 우리 집 부엌도 방바닥보다 훨씬 낮잖아. 왜 그런 줄 아나. 내 여기 동네 처음 와보니 그땐 연탄 때는 집이 어딨어. 다들 나무 때고 살았지. 나무를 땔려니 아궁이를 파야 할 것 아니여. 그래 이렇게 부엌바닥이 낮은 게야. 그땐 동네가 전부다 새카맣지 굴뚝에 연기가 막 올라오고 길바닥만 굴껍질에 하얗고 말여.

부엌이 방바닥보다 훨씬 낮은 이유를 아나

요즘 골목 나가면 대목보느라고 굴들을 많이 쌓아 놨더라고 그때도 마찬가지여.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왔을 때만해도 저 섬으로 배타고 뱃삯주고는 자기힘대로 가서 캐다가는 시장에 내다 팔고 했지만 요즘이야 다 양식굴에 사가는 사람도 있고 그러잖여. 게다 굴까는 이들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 시방 옛날 동네 사람들 이 여태 사는 사람도 있지만 저 앞 줄은 다 아파트로 이사가고 그랬어. 다 돈 벌어서는 말여. 그런거 보면말여...사람맘이야 다 똑같갔지. 여기야 다 노인네들이니까 심정 갑갑하고 그러면 다 문열고 나와서 말들하고 그랬는데. 이젠 그럴 노인네도 몇 없어.
내 여기 들어올 때가 저 화수동고개랑 화평동 너머 개발된다고 집 값이 한창 비쌀 때 였어. 그래 집구하기 힘들어 이 집을 80만원이나 주고 들어왔지. 지금 여기도 개발한다고 그러잖어. 지금도 그래 우리가 나가라하면 집이 어디 있어서 가겠나. 말로는 나가서 한 4년 있다 들어오라는데 죽고말면 그만이지. 개발 해달라고 해달라고 할땐 가만있더니... 막상 된다고 하니 나 같은 늙은이 어디 돈이 있어야지. 요즘에는 벌어 논 거 없고 몸 아프고 남들은 돈 불어 다들 나가고 에휴 속만 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