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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할아버지(81)의 일제시대 만석동

재누리 2013. 2. 19. 22:05

“부두가깝고 공장들 있고
만석동 살기 좋았지.”

박상규 할아버지(81)의 일제시대 만석동

일본화물선과 한국인 노동자들이 북적되는 일제시대 인천항

내가 만석동에 들어온 게 해방전이야. 내 나이 스무 살에 왔으니 벌써 60년이 넘었구먼.
부산에서 대장일을 배우고는 먼저 인천에 올라온 친구의 소개로 이곳으로 온 게지. 인천에는 나 같은 대장장이가 없었어. 만석동에 일본 사람이 하는 대장간이 하나 있긴 했지.
왜정 때는 '대쬬'라는 수첩이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기술자 자격증쯤 되려나...
일본놈들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기 전, 소하 15년(1941년)에 전국에 흩어져있는 기술자들을 관리하는 수첩을 만들었는데 그게 '대쬬'야.
그 수첩에는 내가 어느 공장에서 얼마동안 일을 했고 어디로 옮겼는지가 다 기록되어 있었지. 그걸 일 부리는 사람들이 기술자들을 자기 공장에 묶어 놓는데 이용했지. 사장들이 다 가지고 관리했으니 말야.
왜정 때만해도 만석동은 원래 사람이 사는 동네라기 보다는 공장지대였어. 왜놈들이 지어놓은 조선기계공작소도 있었고 동일방직, 대성목재도 그때부터 있었으니 말야.
만석동에는 집이 얼마 없었어. 지금 저 인천극장 옆에 구름다리 있지. 거기 올라가는 길에 집이 좀 있었고 지금 동사무소 자리 뒤로 집이 좀 있었지. 그래 그 구름다리에서 만석동으로 들어오는 길 있잖아. 그게 그 때부터 있던 길이야. 폭도 바뀌지 않았지. 아침이면 그 길이 공장으로 일하러 오는 사람들로 꽉꽉 찼어. 인천에선 거기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던 길이었지.
지금 만석고가에서 송월동 쪽으로왜놈들 사는 집들도 많았는데, 나중에 왜놈들이 대동아전쟁 일으키고 폭격 맞을까봐 집을 듬성듬성 남기고 일부러 부수고 그랬다네.
내가 만석동에 들어와 처음 일하게된 철공소 사장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만보산사건'이라고 만주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중국 사람들하고 논에 물대는 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어.
그때는 평양에, 인천에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 그래 그 소문을 듣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너머 중국촌에서 폭동을 일으켜 중국 사람들을 죽이고 했다네. 사장도 그때 그 사건에 가담해 징역을 살고 왔다지.
인천의 모든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바다가 좌우하잖아. 왜정 때도 충청, 강화, 덕적 이런데서 인천항으로 물건이 들어오니 객선이 한번 들어오면 짐이랑 사람들로 난리였어.
인천항이 원래가 인천역 뒤에 선창 있잖아. 왜정 때만 해도 거기였어. 지금이야 연안부두 만들어 다들 옮겼지만 말이지.
아, 그러니 만석동 여기가 얼마나 살기 좋았겄는가. 부두도 가까워 고깃배고 화물선이고 다 들어오고 공장도 많아 일거리도 많고 말야.
그 전에는 만석동 여기에 왜정 때 곡스(코오크스)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네. 거 석탄을 태워 곡스 만드는 공장 있잖아. 그게 전쟁 나고 없어졌는데 그래서 그 터를 나중에 사람들이 곡수골이라 부르고 했어. 지금 정유소 있는 자리 그 옆에 말이네.
인천 올라와 처음 일 하던 철공소가 지금 만석고가 바로 밑에 있었어. 나중에는 도급을 받아 일하게 되어 벌이가 꽤 괜찮았지. 다른 사람들 하루 일당이 2~3원 할 때 하루에 20~30원을 벌기도 했으니 말야.
그런데 왜놈들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는 징용으로 사람들을 많이 데려갔잖아.
그때 만석동에 조선소가 대일조선, 인천조선 이렇게 두 개가 있었어.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공장이지. 거기서 일하면 징용을 면할 수 있었거든.그래서 나도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해방되던 해에 인천조선에 들어갔다네.
그런데 징용장이 나온게야. 그 징용장에 적힌 곳이 일본 나가사키 공군기지였어. 거 원자폭탄 떨어진 곳 있지. 거기 말이야. 나랑 같이 징용장 받은 사람이 모두 다섯이었는데, 그중 세 명이 그곳으로 가 소식도 모른다네. 아마 다들 죽었을게야.
그때 회사에 이야기해 징용을 빼지 못했더라면 만석동에서 여태 대장간 일을 할 수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