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명 |
마을형성 |
지명유래 |
도청리 |
현종대(1660년경) 장수황씨 태수씨가 고금에서, 라주정씨 시석씨가 장흥에서 각각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 마을을 이룸. |
불목리라 하였으나 국설 도봉청이 설치되면서 도청리라 하였고, 고종대에 와서 진납제로 되고 도봉청이 폐지되면서 도청리라 하였다. |
도락리 |
1670년대에 강릉유씨 이성과 성산배씨 홍수가 입도하여 산개척지를 찾아 이주하여 이속에 정착. |
당초에는 당리와 합하여 당락리라 하였으나 가구와 인구의 증가로 자연부락으로 분리되면서, 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하여 선친들로 부터 도락리라 칭하였다. |
당 리 |
효종대(1600년경) 초계최씨, 최일선이 입주함과 동시에 경주정씨가 입주. |
마을 주변에 성(城)의 흔적이 있으며, 당초에는 진말이라 하였으나 장보고의 부하였던 청주한씨의 군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석모에 매년 정월5일날 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를 연유하여 마을명을 당리라 부르고 있다. |
읍 리 |
이곳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는 흔적으로는 상교동에서 석도의 발굴과 지석묘(고인돌) 유적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산 것으로 추측되며 1610년대에 제주양씨인 우천이 해남어란에서 입주하고 경주정씨가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라시대에 읍을 설치하였다고하나 고증할 수 없고 읍을 설치하여 치민하였다하여 속명읍 범미리(즐기미)라 불렀고 지금의 리명은 여기에서 연유. |
구장리 |
순종무신년에 제주양씨가 읍리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후 제 성씨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 |
해방후 읍리의 1개반으로 속하여 있다가 1961년 22호로 분리해 리명을 척산이라 하였고 그 후 1963년 구장리로 개칭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권덕리 |
1740년대에 제주양씨인 철운과 암양권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 |
권덕리는 읍리에 속하였으며, 범바위가 있어서 호암동으로 불렀다가 1900년에 권덕포라 하였다가 분구되어 권덕리라 하였다. |
청계리 |
인조대에 김해김씨가 이주에 왔으며, 효종대에 충주지씨, 경주이씨, 밀양박씨가 사화를 피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
임진왜란때에 왜적과 싸워 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으며 그후 인재 및 관리가 배출되어 리명을 장골이라 하였으나, 1930년 마을의 지세와 형세로 보아 맑을청, 시내계의 뜻을 따라 청계리라 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풍리 |
효종대 진주강씨, 김해김씨가 난을 피하여 이주하여 구성산하에 터를 잡아 살았다. |
입도 이주한 강씨가 구성산하에 터를 잡아 구성리라 칭하였으나 그 후 김해김씨 선춘씨가 신풍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부흥리 |
선조말엽 충무공이 전사하자 마하장이었던 함양박씨 이홍이 난을 피하여 강진으로 부터 이주하여 현재 16대손까지 거주하고 있다. |
산세가 좋아 크게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부흥리라 칭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음 |
양지리 |
처음 동촌에 입주하였다가 인조대 안동권씨 득결과 전주이씨가 이주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권득걸이 동천에서 따뜻한 곳을 찾아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명을 양지리라 하였다 |
중흥리 |
숙종대에 연안차씨, 남평문씨와 언양김씨가 월경대사의 지시에 의하여 이주해와 살던중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뒤 이조중엽에 정종의 후손인 전주이씨들이 입주하여 부락을 형성하였다. |
지명유래 동서로 가른 산맥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명두산, 남으로는 매봉산이 북으로는 대봉산 준경이 두루막아 한복판에 넓은 들을 배경르로 그 중앙에 위치하여 중흥리라 칭하였다. |
신흥리 |
이조숙종대에 상서리(덜리)에서 연안차씨, 언양김씨가 해안과 가까운 현마을에 해초와 고기잡이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함. |
일제시대에는 불당곡,해리,쌍산보를 합하여 신흥리라 부르고 되었다. |
동촌리 |
이조선조때 난으로 인하여 연안차씨 산립관 진주정씨가 입주하였으나 대부분 조약도(약산면), 제주로 이주 갔으며 후대에 김해김씨,제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
고명선산인 청산도 오대산의 하나인 응봉산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촌리라 칭하였다 |
상서리 |
인조대에 난을 피하여 이주한 밀양박씨, 언양김씨, 나주림씨가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본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마을이라 하여 상동이라 칭하다 1860년대에 원동리로 분리되면서 상서로운 마을이라 하여 상서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원동리 |
상서리의 인구증가로 1860년대에 언양김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860년대에 상서리에서 분리되면서 골리라 불렀으며 이후 후손들이 한자골(동)자를 붙여 원동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진산리 |
선조대에 나주임씨가 강진에서 이주해 왔으며 동시 연안차씨가 입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후 언양김씨, 초계최씨, 경주김씨, 관산위씨, 김해김씨, 추계추씨 등이 입주하여 부락을 형성하였다. |
대봉산, 솔중산, 오산, 다량산관 전면에 노적도를 두고 아침햇볓을 처음 볼 수 있는 광명의 참되고 보배로움을 지니고 있다하여 마을명을 진산리라 부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국화리 |
조선인조 1630년경 초계최씨가 난을 피하여 입향거주하였으나 자손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였고, 1790년대에 장흥 관산위씨 금만씨가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
마을주변에 들국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가을이면 국화가 만발하게 되고 마을 뒷산과 옆산의 형곡이 초변으로 되어 있으며, 마을형태가 말자형으로 되어있다 하여 국화국, 꽃화 자를 붙여 국화리라 불렀다 함. |
지 리 |
1610년대에 김해김씨가 강진에서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
마을 중앙에 카다란 연못이 있어 '못김'이라 부르다 1920년경 지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여서리 |
1690년대 진주강씨가 처음으로 입도 정착했으나 그후 정씨, 김씨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
일제시대에는 대량도라 하였고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으나 그후 려서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
모동리 |
1620년대에 말,방,서씨가 입도하였으며 그후 추씨 김씨등 제 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
띄가 많다고 하여 모도라 하였고, 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모동리라 하였다. |
모서리 |
1620년대에 마,진씨가 입도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두성씨가 모두 이거하고 리천서씨와 초계최씨가 이주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띄가 많다고 하여 띄섬(모도)라 하였고, 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모서리라 하였다 |
모북리 |
서기 1620년대에 황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였다 전하고 있으며 그후 최씨, 서씨등 제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모도의 북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모북리, 혹은 소모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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