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여러 정보 매체를 통해서 구들의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만큼 구들의 역사에 대한 역사적 실체가 관심 사항으로 떠올랐다는 말이 된다.
근래까지 밝혀 온 고고학자들의 유적발굴과 연구로 구들의 역사는 점차 길어져 삼국시대이전 신석기를 지나 훨씬 더 먼 수만 년 전으로 들어가고 있다.
근년에 들어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면서 그 근거가 점차 뚜렷해져 가고 있어서 민족문화의 역사적 진실성을 재확립한다는 의미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독특한 난방문화라는 근거를 지팡이 삼아 앞으로 있을지 모를 북방영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지금까지 구들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으로는 A.D. 500-513년 북위의 려도원(麗道元)이 쓴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 권 14 포구수조(鮑丘水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국 북경 동북부 고구려 접경에 위치한 관계사(觀鷄寺)의 구들형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바닥 밑에 몇 개의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서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 고 하며 바닥은 모두 석판으로 깔았고 지붕은 모두 흙으로 메웠으며 안에는 많은 통로가 있어 마치 경맥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것 같다. 바깥의 방 옆으로 네 곳에서 불을 지피고 열기는 안으로 들어가 전당 전체를 따뜻하게 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즉, 바닥은 모두 석판으로 깔았고 지붕은 모두 흙으로 메웠으며 안에는 많은 통로가 있어 마치 경맥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것 같다. 바깥의 방 옆으로 네 곳에서 불을 지피고 열기는 안으로 들어가 전당 전체를 따뜻하게 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외에 수경주보다 100여년 지난 중국 당나라 시대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에도 구들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구당서 고려전에 “겨울철에 긴 캉을 만들고 아래에 따뜻한 불(숯불, 溫火)을 지핀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때 최자(崔滋: 1181-1260)가 보한집(補閑集)권하에 “급히 땔나무로 불을 피워 구들을 따듯하게 하고 떠나 ... 작은 돌로 아궁이를 막고 회를 이겨서 틈을 메꾸고... ”라고 쓴 것을 본다.
한편,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 중 발해의 구들에 대한 설명을 삼국유사 券 第 一에서 볼 수 있는데, 해석을 보면 “기단 위 중앙 3개의 방 북쪽 툇간에 구들이 있는데 북쪽 툇간의 것은 한 줄이고 나머지는 두 줄 고래이다. 구들바닥은 방바닥 면적의 1/3 정도로, 고래는 한자 두께이고 세치 두께의 구들장을 놓았다 동쪽방과 그 북쪽 툇간의 구들 고래는 합쳐져 북쪽방 밖으로 뻗어 나가 방형평면의 굴뚝에 닿는다. 또 서측방과 툇간의 구들 고래도 마찬가지로 합쳐져 북쪽방밖의 굴뚝과 닿아있다. 굴뚝은 사방 27척의 크기이다(중략).“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방 전체를 덥히는 발달된 구들양식은 짧게 보아도 이천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겠다. 즉, 단기2452년(서기119년) 신라 지마왕 때에 만들어졌던 “아짜방”구들은 그 역사가 이천년이 되고 있으며, 1931년 일본인 ‘후지타 료사크’의 <청구학총> 기고문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의 구들유적 발굴결과 그 구조가 오늘날과 같은 전면 구들이었다고 적고 있음을 볼 때 앞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자료들을 찾아 왜곡된 문화의 역사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유적으로 알 수 있는 구들의 역사로써, 초기철기시대(B.C 300 -)의 시기로 추정되는 영변군 세죽리 제일 윗층과 2기층 및 3기층 집 자리에서 볼 수 있는 “ㄱ"자형 한줄 고래와 이러한 형태의 움집들 중 지금까지 발견된 긴 고래구들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수원시 서둔동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터널식 구들의 모습도 발견 하게 되는데, 이 유적에서는 특이하게 구들 쪽은 붉은 진흙을 사용하고 아궁이쪽은 논흙과 같은 것을 사용하여서 고래의 내부는 흙이 불에 구워져 토기처럼 단단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반도와 지금의 만주전체에서 번성한 문화를 이룩하여 왔던 고구려이전까지도 하나의 맥으로 면면히 이어온 우리 선조들의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어 구들에 대한 정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건축술의 발달과 구들의 발달이 모두 같이 이루어졌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보아 유적발굴에 의한 구들의 연구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위치한 고려 시대에 창건한 선원사(禪源寺)는 원래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절로, 이 사찰 터에서 지금까지 알려졌던 서너줄 고래와는 달리 열 다섯줄 고래의 형태가 있고 특히 G지구의 동쪽칸 구들은 그 구조가 특이하여 높은 수준의 구들공법이 적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궁궐의 구들 중에는 ‘탕방’이라는 겹구들 양식이 있는데, 줄고래 형식의 아랫단 구들에서 올라온 열기가 윗단의 방사형 고래를 지나는 특이한 구조로 급작스러운 바닥온도의 변화가 없이 장시간 온기를 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서구인들이 기록한 구들 이야기<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주강현지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소개되어 있다. 이렇듯 외국인에게까지 친숙하고 귀족적이면서도 서민적인 우리 문화의 한 뿌리로 긴 세월 자리매김하여 왔는데, 이제 와서는 점점 더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시설까지 “근대화”라던가 “개량”이라는 용어만 씌우면 구들장부터 들어내고 뒷간부터 없애버리니 이 무슨 야릇한 일인지 모르겠다. 서양의 경우 10세기경 까지는 모닥불의 형태로 취사와 난방을 하였다. 우리가 분위기 있게 보는 벽난로도 약 10세기경부터 등장하였으며,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난로형태의 난방법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1400년대였으며 그나마 연통 있는 기구는 18세기 들어 와서야 보게 되었다. 부유한 계층에서 벽돌로 침상을 만들고 그 속에 난로를 피웠다는 기록이 발달된 난방법이었고, 이러한 것이 일반화되기까지 서구인들은 그저 실내에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우고 연기와 싸우며 추위를 견뎌온 것으로 되어있다. 영화를 보아도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유난히 연기속의 저녁 장면이 많이 보이는데, 우리 역사물속에서는 그러한 장면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겠다. 우리 선조들은 불을 정면에서 맞서서 불을 이용하였다. 그리고는 구들 위에서 그 불기운을 깔고, 밟으며 살았다. 반면에 서구인들은 불을 측면에서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수백 년 만에 벽난로나 라디에이터 등의 난방법으로 진행시켰다. 감히 불 위에서 산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두었던 셈이다. 서양에서 구들과 같은 양식으로 남아있는“하이포코스트(Hypocaustum; Hypocaust)”는 로마시대에 있었던 바닥 난방방법으로, <프레푸르니움>이라 불리는 아궁이에서 불을 피워 바닥아래를 순환하여 바닥을 덥히고 그 뜨거운 열기가 테라코타 튜브나 판석으로 만들어진 속이 비어있는 벽을 타고 올라가게 되어있는 시설을 말한다. A.D.212년 잔인한 황제로 악명이 높았던 카라칼라황제는 로마의 어려운 재정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려 2,800여 평 크기의 목욕탕을 건설하여 열탕, 냉탕 등에 사용되는 물이 하루에 8,000톤에 달하였고 50군데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기 위하여 2,000톤의 장작을 재워 놓았다고 하며 A.D.284-305까지 있었던 디오클레시안 목욕탕은 그 규모가 무려 27만 평방피트에 달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친 짓이었다. 1:아궁이 2:고임돌(바닥지지 타일) 3:고래 공간 4:벽돌바닥 5:바닥 6:굴뚝박스 Philip Nixon(DURHAM COUNTY COUNCIL)의 사진 중 빈체스터 로만 하이포코스트 형태. 제작된 고임돌용 석재와 그 높이로 규모를 가늠 할 수 있다. 이후에 중부 유럽, 지금의 독일 지방에서 주택난방용의 구들이 나타나는데, 아궁이에서 방 중앙까지 한 줄의 불목 길을 만들고, 방 가운데 부분을 막 고래구들로 설치한 후 여기에서 네 귀퉁이로 한 줄 내굴길을 만들어 각각의 굴뚝으로 연기를 배출 한 형태로 되어있다. 서구에서 “바닥 난방법”에 대한 인식이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적인 주거용이라기보다 엄청난 규모의 비싸고 사치스러운 시설로 굳어져 서민들에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고, 어쩌면 이로 인하여 침대와 탁자 같은 대용품들이 더욱 발달하면서 그들의 생활은 점차 규모의 거대화와 연료의 낭비, 그로 인한 필요성의 증대로 물질과학의 필연적인 발전 및 식민주의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에는 “캉(長坑)”이라는 쪽 구들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데, 그들의 주거문화 특성상 방 한구석에 침상과 같은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 쓰고 그 외의 곳에서는 난로와 같은 설비로 난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궁이가 집안에 있는 구조로, 초기 구들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게 되어 우리와 같은 발달된 구들을 갖지 못 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중국 <투르판>에 사는 위구르인들의 주거형태에서는 집안에 아궁이를 만들고 한쪽에 걸터앉을 수 있게 쪽 구들을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캉은 구들과 달리 방 일부분에만 고래를 만들고, 고래윗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위에서는 신발을 신은 체 생활하게 되어 먼지 등의 오염원을 처리하기 어려우며 아궁이에 해당하는 화구가 방안에 있으므로 하여 화재에 약할 뿐 아니라 실내에서의 연기문제 또한 해결하기 어렵다. 지금의 만주, 우리의 옛 터인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곳의 구들 형태가 지금에 와서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과 조선족의 양식들이 혼재되어 만들어지고 있는데, 신을 벗고 들어가야하는 우리문화의 전면 구들(통구들)은 조선족만이 쓰고 있고 만주족과 한족들은 아직도 쪽구들이나 'ㄷ‘자 형태의 변형구들방을 만들어 쓰고 있다.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김준봉 지음, 청홍. 일본에서는 1-2세기 때의 우리나라 춘천 중도 유적지에서 나타난 움집형태에서 쓰였던 모양의 난방법을 일본의 북해도 ‘모요로’유적인 찰문식(擦文式) 움집에서 볼 수 있으며 다다미 주거문화이전부터 집안에 화덕같은 것을 만들어 직접 불을 피우거나 숯불을 사용하여 오고 있고, 고다쓰(こたつ)라고 하는 화로와 같은 설비위에 덮개를 씌우고 둘러 앉아 난방하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한편, 근래에 일본에서도 구들의 흔적이 발견 되었는데, 우리나라 공주 정지산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대벽건물과 같은 건물의 5세기경 유적에서 구들의 형태가 오사카 나라현 가시하라市에서 발견되었고 시가현 오츠市에서도 발굴되었다(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2004). 그들이 말하는 “구다라(くだら=큰나라)” 즉 백제인들이 지었거나 그들에게 배워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진이 많은 일본의 지형상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의 “이로리”난방 형태, 방안에 사각형 구덩이나 테를 두르고 불을 피워 난방을 한다. 잘못된 역사교과서들과 달리,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큰 변란이나 이동이 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꾸준히 이어 오면서 문명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 반면, 중국 등은 수많은 변란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이 한곳에서 오랜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고 우리보다 덜 안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들과 같이 정착된 문화의 과학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