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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인천

재누리 2009. 3. 25. 18:04

# 1930년대 인천 노동자의 궁핍함 - 이태준 ‘밤길’

인천을 소재로 한 소설은 여럿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인천 개항장 풍경』(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6)에 수록된 이태준의 ‘밤길’이라는 소설 한 편을 부분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 당시 인천항 하역작업  
 


이태준(호 ; 상허. 尙虛, 1904~?)의 작품은 대부분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서정적인 필체로 그려낸 것들이다. 그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번 되풀이해 고칠 정도로 정제된 언어사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인간 세상과 그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본 그의 단편소설이 뛰어난 서정성과 예술적 완성도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40년 <문장>에 발표된 단편 소설 ‘밤길’은 1930년대 도시 빈민의 궁핍한 삶과 어린 자식의 죽음 앞에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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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에 등장하는 황서방은 서울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일자리가 많은 인천으로 내려온다. 황서방의 바람은 일자리를 통해 돈을 벌어 평소 먹고 싶었던 것들을 실컷 먹는 것이다.
와서 이틀 만에 이 역사터를 만났다. 한 보름 동안은 재미나게 벌었다. 처음 사나흘 동안은 품삯을 받는 대로 먹어 없앴다. 처자식 생각이 났으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선 내 입에부터 널름널름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서울서는 벼르기만 하던 얼음 넣은 냉면도 밤참으로 사먹어 보고, 곰국, 순대국, 호떡, 아수꾸리까지 사먹어 봤다. 지까다비를 겨우 한 켤레 샀을 때는 벌서 인천 온 지 열흘이 지났다. 아차, 이렇게 버는 쪽쪽이 집어싸선 만날 가야 목돈이 잡힐 것 같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려 대엿새째, 오륙십 전씩이라도 남겨나가니 장마가 시작이다. 그 대엿새의 오륙십 전은, 낮잠만 자고 다 까먹은 지가 벌써 오래다. 집주인한테 구걸하듯 해서, 그것도 꾀를 피우지 않고 힘껏 일을 해왔기 때문에 주인 눈에 들었던 덕으로, 이제 날이 들면 일할셈치고 선고까로 하루 사십 전씩을 얻어 연명을 하는 판이다.…(중략)…황서방은, “으흐흐…….” 하고 한자리 통곡을 한다. 애비 손으로 제 새끼를 이런 물구덩이에 넣을 것이 측은해, 권서방이

   
 
  ▲ 월미도가는 길  
 
아이 시체를 안으러 갔다. “뭐?” 죽은 줄만 알고 안아 올렸던 권서방은 머리칼이 곤두섰다. 분명히 아이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꼴깍꼴깍 아이의 입은 무엇을 토하는 것이다. 비리치근한 냄새가 홱 끼친다. “여보 어디?” 황서방도 분명히 꼴깍 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아직 목숨이 붙었다. 빗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간 것을 게운 것이다. “제에길, 파리새끼만두 못한 게 찔기긴!” 아비가 받았던 아이를 구덩이 둔덕에 털썩 놓아 버린다. 비는 한결같다. 산골짜기에는 물소리뿐 아니라, 개구리, 맹꽁이 그리고도 무슨 날짐승 소리 같은 것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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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내려와 일자리를 찾자마자 황서방은 자신이 먹고 싶었던 것들을 먹는다. 그는 “처자식 생각이 났으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사나흘 동안은 품삯을 받는 대로 먹어 없앴을” 정도로 식욕을 해결하는 일에 매달렸다. 온전한 가장이기에 앞서 자신의 식욕이 요구하는 대로 입에 무언가를 넣은 일에 골몰했던 것이다. 절대 궁핍상태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다가 겨우 돈을 모으기 시작했을 때에는 장마라 일자리를 놓치고 만다. 식욕에서 벗어났지만 그에게 또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서방보다 훨씬 젊은 그의 아내는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남은 아이들은 굶주림과 병에 시달렸던 것이다. 게다가 젖먹이 아들은 병에 걸려 죽어 간다. 이를 보다 못한 주인 영감이 아이들을 월미도 공사장에 이끌고 내려와 황서방에게 넘기고 가 버린다. 어린아이를 안고 허둥지둥 병원을 찾았으나 아이의 병세는 매우 위독해 오늘밤을 못 넘기겠다고 한다.


공사장으로 돌아온 황서방은 새로 지은 집에 주인이 들어오기도 전에 시체를 내갈 수 없다는 권서방의 생각에 동의하며 비 내리는 밤길에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나온다. 동료인 권서방과 함께 아이가 빨리 죽기를 기다리지만 아이는 금방 죽을 것 같으면서도 쉬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심사를 어찌 표현하겠는가? 둘은 주안 쪽을 향해 걷다가 아이의 숨이 끊어졌다고 판단해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아이를 묻으려 한다. 순간 아이의 목숨이 아직도 붙어 있음을 알고 권서방은 놀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아이가 죽자 구덩이에 아이를 묻고, 황서방은 “내 이년을 그예 찾아 한 구뎅에 처박구 말 테여.”라고 외치며 통곡한다. 어둠과 빗줄기 속에 황서방은 주저앉아 버리고, 개구리와 맹꽁이 소리만 들려 올 뿐이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과 대비된 자신의 처지를 더욱 불우하게 여겼을 터이다.

   
 
  ▲ 월미도와 연육교  
 


죽어가는 아이를 물구덩이에 매장하는 아비의 심정은 하늘의 먹장만큼이나 암당하고 처절하다.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는 가장의 비참함과 참담함이 배경인 장맛비처럼 작품 전체에 흐른다. 하늘에 가득찬 먹장구름 같이 하루 품을 파는 황서방의 미래는 암담하다. 도시를 전전하지만 전혀 나아질 것 같이 않은 생활의 모습은 당대 도시 빈민의 전형적인 삶이다. 노동을 하지만 그 노동의 결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도시 노동자들의 삶이며, 컴컴한 밤길에 한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장대비를 헤쳐나가는 것이 도시빈민의 절망적 모습이다. 도시빈민의 절망적 삶과 노동자계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근대화가 되면서 항구도시인 인천은 새로운 노동의 현장으로 떠오른다. 1929년 세계적 규모의 공황으로 일본경제는 위기에 빠졌다. 이에 일본제국주의는 경제를 군사적으로 재편성하기 위해 공업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꾀하며 일제 독점 자본의 침투를 확대했다. 그래서 1920년대 약 5만 명이었던 노동자가 1928년 자유노동자까지 합하면 1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또 일제는 자신의 원료공급지로 필요한 부분만을 육성했기 때문에 인천만 선별적으로 개발했다.


그러므로 인천은 많은 노동자들이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초반 인천지역의 공장 수는 60~70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인천에는 대규모 중공업 공장의 건설과 일본 재벌 군수공장이 생기면서 인천은 일약 경인공업지대의 중심핵으로 떠올랐다. 당시에는 전쟁 지원 공업이었던 식료품 공업과 기계 금속 공업의 신장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이렇게 인천은 근대 공업도시로서 노동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풍부한 노동력으로 생산의 중심에 섰던 공업도시 인천은 상업도시이며 소비도시였다. 이태준은 이러한 근대 공업 도시 인천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현실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그들의 애환과 비애를 형상화한 것이다.  
  (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