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풍물을 광고를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기의 사회와 역사를 재구성해 볼 수 있는 또다른 중요한 요소다. 다양한 광고 속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내용들은 그 시기를 살아가고 있던 모든 이에게 새로운 문명에 접해가는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 인천에서 활동했던 독일계 세창양행의 최초 광고, 고백
알려진 것처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상업광고는 인천에서 그 상업적 기반을 확고히 한 세창양행이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 제4호에 실은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에서 출발한다. “쇠가죽, 말가죽, 개가죽 등을 사들이고 자명종 시계, 서양바늘, 유리 등을 외국에서 들여다가 팔고 있으니 많이 이용해 달라”는 내용으로 광고라는 이름 대신 “고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고 공정한 가격으로 팔겠다”는 말 그대로 고백인 셈이다.
오늘날과 같은 ‘광고’라는 이름으로 광고가 시작된 것은 일본상인들의 광고문을 통해서였는데, 1886년 6월 31일자 《한성주보》 제22호에 염색약 제조법 광고, 옷감과 곡물 등을 판매하는 상점광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광고는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과 비슷한 시기의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민간신문 등이 발행되면서 약, 책 등 다양한 광고가 실리게 됐다. 그 중에서도 수입담배와 염색약이 대표적인 광고였다. 일제강점기의 광고는 일본기업의 상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업종별로는 약품광고가 가장 많았고, 조미료, 화장품, 비누, 서적, 식료품 등 생활필수품 광고가 자주 등장했다.
당시 각종 광고들의 경향을 찾아보면, 초기 광고는 의약품이 많았고, 1910년대 들어 장신구 광고가 늘어나고 있으며, 1920~30년대에는 화장품 및 장신구 광고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 이때는 의류광고도 많이 보이는데 특히, 양복점과 각종 양복의 사진이 많이 실렸다. 더구나 양복의 도입에 따라 양화와 고무신, 모자의 수요가 급증했고 광고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근대적 모습을 갖춘 소위 ‘모던 뽀이’나 ‘모던 걸’이라면 당시 유행됐던 패션물품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근대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광고는 낯선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을 끌면서 생활정보의 하나로 인식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광고는 조선이 일본기업의 소비시장으로 활용됐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었고, 이 점은 광복 이후에도 남아 우리의 산업구조가 바뀌기 전까지 전반적인 생활패턴과 그에 따른 광고성향을 지배했다.
▲ 아사오카여관 광고 | ||
# 생활사의 퍼즐 맞추기, 광고
1905년~1930년대 초반까지 인천향토 자료에 등장하는 광고문을 유형화 해보면 조합, 회사, 생활용품, 금융, 관광, 숙박 등의 항목으로 분류될 수 있다.
조합의 경우,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소업체들은 서로의 권익보호를 위해 장유양조조합, 운송조합, 목재상조합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고, 항구라는 특성상 선박하역과 관련된 조합이 큰 위치를 차지했다. 하역일꾼들은 주로 야마토조합(大和組)·후쿠시마조합(福島組)·아사히조합(旭組)·기무라조합(木村組)·요시다조합(慶田組)·에구치조합(江口組) 등 이들 중 하나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각 조합에는 조장(組長)이 있고 그 밑으로 작업반장이 있어서 조합을 통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회사의 경우, 인천지역의 회사나 상회들은 부산, 원산 등 타 개항장에도 지점을 개설해 한 광고문에 전국의 지점을 다 같이 소개하는 방식으로 선전했다. 이들의 광고문안을 보면 생필품과 관련된 다양한 항목들이 유통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건물을 광고의 배경으로 했지만 주로 글로 전달하는 방식의 광고를 하고 있다.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광고로는 양복점(近江屋吳服店), 양품점(古田양품점), 정미소(奧田정미소, 주명기정미소, 인흥정미소, 김태훈정미소), 정종광고(宅合名회사 光武 正宗, 菊正宗), 간장(野田醬油), 비누(애경사), 우유(岩本우유), 가구점(洋家具敷物店), 사진관(梶谷靜風), 약국(高田藥局), 철물점(阿波屋), 시계포(三浦) 등인데, 인천항이 당시 곡물의 집하장이었던 것과 관련해 정미소 광고가 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미업은 인천항의 중요산업이었는데, 인천의 정미 1일 생산능력은 7천 섬이고, 1년에 100만 섬을 도정했다. 정미기는 240대 이상으로 주로 엥겔식을 사용했다. 특히 벼에서 현미로 조제하고 다시 정미로 완성하는 공장이 많았다. 연료는 전력 이외에 왕겨를 사용하는 것에 가토(加藤), 아리마(有馬)의 두 공장이 있었다. 그 외 소정미소가 21곳 있었다는 것도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금융업은 주로 일본제1은행지점, 18은행, 58은행지점이 중심이었고, 그 외 조선상업은행, 조선식산은행, 조선신탁회사, 인천도시금융조합이 설립돼 소상공업자의 금융기관 역할을 했던 것도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정미소광고 | ||
경인철도가 건설되기 전 인천항으로 들어온 외국인의 여행자는 인천에서 머물지 않으면 안 됐는데, 초기에는 대불호텔, 이태호텔이나 수진여관 등이 성황을 이루면서 숙박시설들이 많이 생겨 광고도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1900년 경인철도 개통 후는 점차 쇠퇴했다. 그런 반면 1923년 월미도유원지가 조성되자 경인철도를 이용, 관광을 위해 월미도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 관광홍보 광고가 많이 등장한다. 오락, 숙박시설 광고는 아사오카(淺岡)여관, 우로꼬(麟), 긴스이(銀水), 도요켄(東洋軒)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사용했던 광고에 들어가는 소박한(?) 문구를 보면 현란하고 자극적인 지금의 광고 내용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웅대한 전망대, 여름철 최상의 장소, 넓은 바다, 대형 풀장, 임대 별장, 넓은 홀, 여관, 임대 공간, 전용룸, 오락장 등 유원지 시설 완비. 섬 가득한 늙은 앵도꽃, 오얏꽃이 봄을 장식하고 노니는 사슴이 가을을 이야기하네... ”(월미도 유원)
“여러 관청 각 회사 지정 여관, 친절 정중, 찻값 폐지, 인천부 중정(관동) 전화 장 53번”(아사오카여관)
우리나라 광고의 전반적인 성향과 비교할 때 인천 광고의 특색은 정미업광고와 미두취인소, 선박운송, 하역조합광고문들이 특히 많이 나타난다. 당시 일본상인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성공하면서 타 지역으로 진출해 갔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광고의 기법이 다양하거나 현란한 색채감이 없어 재미있는 광고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당시 광고를 게재할 수 있는 제한적 요인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주로 당시 문헌자료, 특히 상공회의소나 관청 등 기관에서 만든 책자 속에 남겨진 광고라는 자료가 갖는 한계성도 그렇지만 광고를 게재할 수 있었던 정책적이고 특정적인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 은행광고. | ||
생활사를 재구성해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더구나 역사를 미시사적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현재의 추세에서는 문헌자료와 유물·유적은 물론이고 구술기록이나 사진, 일기 심지어 메모지나 간단한 스케치, 광고 등 그야말로 세세한 자료들이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 중에서 특히, 광고로 인천의 근대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과제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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