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단순한 재화를 교류하는 곳이기보다는 사람들의 정보교류와 사람과 사람을, 공간과 공간을 묶는 끈과 같은 역할은 한다. 인천도 개항과 더불어 시장이 생겨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권과 시장의 형태도 변화하고 있다.
인천에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문헌자료를 보면 개항을 전후해 시장의 형태와 그 발달과정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개항 이후 현재의 중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특히 개항장이었던 중구 신포동 일대에 시장이 개설됐다. 당시에 개설된 시장은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과 야채를 취급하는 시장이 따로 있었다. 수산물은 주로 인천연안에서 수확한 것 외에도 충청도 연안에서 잡은 것도 취급했고, 야채시장에 취급되는 채소는 인천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인천외곽에서 재배한 화농(華農)의 농산물이었다.
조선시대의 지역별 시장분포 현황을 상세히 기록한 ‘임원경제지 예규지’에 따르면 1830년경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에는 93개 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전부 5일장인 정기시장으로 오늘날 같은 시장과는 다른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기도 일원의 시장 수와 분포도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시장의 위치도 도호부가 있었던 관교동과 부평 일원이었다. 즉 개항 전에는 제물포에는 시장이 없었던 것을 짐작하는 부분이다.
개항과 더불어 시장의 형태가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변하고 유통의 중심지도 변해가게 되는데, 그 진원지는 개항장 주변지역이었다. 인천 최초의 상설시장은 미두거래소였다. 이는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효시로 1896년 개설돼 증권과 달리 미두 후에는 대두로 거래를 했고, 1900년대 접어들면서 타 분야에서도 상설시장의 개설이 본격화됐다.
개항 당시의 시장은 지금의 신포동 일대와 바다와 가까운 해안동 일대에 형성돼 있었으며, 한국인 전용시장과 일인시장으로 형성돼 있었다. 한국인 전용시장은 주로 곡물, 수산물, 농구, 연료 등을 취급했고, 일본인 시장에서는 식료품 일용잡화, 의류 등을 주로 거래했다.
1895년(고종 32년)경부터 정흥택(鄭興澤)이 근해 어업자들이 잡아온 어획물을 독점적으로 사들여 내동 근처의 좌상과 행상에게 팔아오다가 1902년(광무 6년)에 이르러 이곳에 어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시장형태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것이 인천에 있어서 우리상인이 처음으로 만든 시장으로 추정된다.
인천에는 부(府)경영의 공설 일용품시장이 2곳 있었다. 신정(新町) 41번지에서 생선류를 파는 제1시장과 신정에서 야채류를 파는 제2시장인데, 일용품 잡화는 설치되지 않았다.
생선시장은 명치 28년(1895)경 정흥택이 어업자의 어획물을 거의 다 매입해 시장 부근의 노점상인 또는 행상인에게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35년(1902)경 현 시장에 어시장을 개설했고, 여기에 처음으로 시장의 형태가 이루어졌다. 1905년경 일본인만으로 그 앞에 같은 어시장이 개설됐기 때문에 일본인들과 대립경쟁이 됐다. 자연스레 일본상인은 주로 비교적 고가의 선어만을 일본인 고객에게만 한정해 판매했다.
‘인천석금(仁川昔今)’은 당시의 상가 정황을 단편적으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옛 인천의 저자 거리는 닭전 거리 부근에서는 내동과 싸리재 마루턱 이었다. 이 거리가 가장 번화했고 길도 넓었다. 인천은 항구라 물자의 교류는 바다 부근이 먼저 발달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아침저녁 찬감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외(內外)도 있고 행상도 쉴새 없이 골목길을 다니기 때문에 상점이란 것이 별로 많지 않았고 옷감을 파는 조단(調緞)포목상이 고작이었다. 당시 인천에는 닭전, 생선전, 푸성귀전이 신포동~내동 근처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7년경부터 지금의 신포동 일원에 한국인 및 청국인 노점상들이 밀려들기 시장했고 그 숫자는 당시 일본이 도로 체증 및 위생상의 이유를 들어 이동행상 또는 점포 행태를 취하도록 조치를 해야 할 정도로 많았다.
# 청국인이 연 농산물시장(현 신포시장)
이처럼 노점상 문제가 발생하자 일본은 1912년에 또다시 지금의 해안동 일대 매립지에 농산물 전문으로 150평 규모의 청물시장을 건설하려 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정작 농산물시장(지금의 신포동)을 연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던 청국인이었다.
이에 반해 공산품과 잡화류 취급점들은 상품의 특성상 도로변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 형태보다는 도로변에 군집하는 형태로 상권을 이루었다. 개항 전부터 인천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주택과 점포를 건축하기 전에 우선 초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인천 경제의 중심이 항만에 있었던 관계로 이들 외국인 점포의 대부분은 항만 인근에 있었던 닭전거리와 내동, 싸리재 고개를 잇는 거리로 밀집됐다. 이 거리에서 이들은 잡화 등 일용 필수품과 포목, 그리고 밝은 석유등과 외국성냥, 유리그릇 등을 진열해 소비자를 끌었다.
그 후 인천항 경기가 활성화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철도 부설로 교통이 편리해지자 지역의 상권이 변화해 지금의 동인천역 일대가 새로운 유통 중심지로 각광을 받는다.
1927년 일본인이 주축이 돼 농산물의 공동판매를 목적으로 창립된 인천물산주식회사가 1928년 6월 제2공설시장에 대한 부영(府營) 대행권에 출현을 내면서 농산물 판매는 경쟁관계가 된다. 결국 1929년 경기도령 제5호로 청물(靑物)시장 관리 및 사용 조례가 시행되고 1930년 1월 이들 두 회사에 대한 자본합병이 추진된 결과, 부영 대행권이 인천물산주식회사에 허가되면서 청과류는 인현동시장에서, 채소류는 신포동시장에서 각각 판매하게 됐다.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시장개설 노력은 계속 됐고, 1935년을 전후해 한국인 박영성이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형태의 시장을 개설한 데 이어 유창호가 현 중앙시장 인근 개천가에 야시장을 운영하면서 지금의 중심시장의 터전을 개척하게 된다.
인천부도 지금의 중앙시장 인근에 양철 지붕의 인천부 일용품공설시장을 만들었으며 그 관리인은 당연히 일본인이었다. 이후 일제 말기로 오면서 동인천역에서 배다리까지의 참외전 거리는 싸리재 고개에 버금가는 인천의 저자거리로 명성을 날리면서 지역 상권을 주도해 나갔다.
1914년 일제는 시장규칙을 제정해 종래의 시장을 재래시장, 식료품 판매시장, 수산물·청과 경매시장을 나누었으며, 모든 시장은 시·읍·면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시에는 공설시장을 설치하도록 해 시에서 선정한 일본인에게 운영권을 주었다. 또한 1914년의 시장규칙에는 “시장은 공공단체 또는 그것에 준하는 것이 아니면 경영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시장에 자기들 임의대로 1호에서 4호까지 번호를 붙여 보통의 정기시장을 1호시장으로, 도시의 공설소매시장을 2호시장으로, 청과물이나 수산물 도매시장을 3호시장으로, 곡물시장을 4호시장으로 각각 분류했다.
<※ 자료제공=인천역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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