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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시장발달사-1

재누리 2009. 3. 25. 17:57

일제 강점기에 일용품 소매시장 및 수산물·청과류의 도매시장 경영은 인천부의 관할이었는데, 1927년에 오면 시장 사용이 허가제로 되고 사용료는 징수했다. 인천에는 부(府)경영의 공설 일용품시장이 2곳 있었다. 신정(新町)에서 생선류를 파는 제1시장과 야채를 파는 제2시장인데, 일용품 잡화는 설치되지 않았다.

 # 어시장(생선전) : 인천수산주식회사
 
생선시장은 1895년경 정흥택이 어업의 어획물을 거의 다 매입해 시장부근의 노점상인 또는 행상인에게 판매했기에 일본인 이나타(稻田勝諺)는 어시장 개설을 허가 받아 1898년 5월 북성동 11번지 근방에 어시장을 개설한다. 1900년 3월 기존의 어시장관계자도 합류해 ‘인천공동어시장조합’이 결성된다. 1907년 일본인이 ‘인천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해 1906년 5월 우리나라 수산업자들이 ‘대한해산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치하려 했지만 통감부에 의해 저지된다. 이후 인천에 단일 어시장을 경영하게 된 인천수산주식회사는 1908년 5월 인접지 해안에 30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해 시장을 신축하고 전용잔교까지 설치한다. 그 당시 취급하던 상품의 주요 원산지는 부산, 인천, 통영, 군산, 마산, 원산, 삼천포 등 전국적이었으며 이곳을 거친 상품은 주로 서울로, 일부는 경의선과 원산선을 이용해 북부지방까지 갔다.

1930년대부터 정흥택 일가의 세력이 퇴조하고, 인천수산업계도 일본자본에 잠식돼 생선소매시장은 위축

   
 
됐다. 이때부터 하야시가네(林兼)상점 인천출장소, 하마다(濱田)상점, 무라타니(村谷)상점 등이 인천의 수산시장을 거의 독점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수산물통제가 이루어져 광복 직전에 경기도 어업조합연합회로 됐다가 광복 후 이것을 계승해 인천시수산협동조합으로 바뀌었으며, 현재는 연안부두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생선가게에서는 얼음이 필수적인데 하야시가네(林兼)상점 인천출장소가 1932년에 대한제분 공장 건너편에 1일 제조능력 15t의 제빙공장을 설립해 얼음을 공급함에 따라 한강의 천일얼음을 사용하는 일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현재 어시장은 연안부두로 이전했고 활어, 건어물, 조개, 꽃게, 젓갈류 등 150여 종의 수산물을 취급하고 있으며, 인근의 밀집된 횟집과 연계해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변화하고 있다.

 #  푸성귀전(야채시장)과 신포시장

19세기 말 신포동에 있던 중국인 푸성귀전은 신포시장의 전신이다. 푸성귀전 안에는 20여 개의 채소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의 주인은 모두 중국인 화농(華農)들이었다. 고객은 주로 일본인들이었고 한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배추, 무. 양파, 토마토, 피망, 당근, 우엉, 마, 연근 등을 거래했고 야채시장의 주인이 주로 중국인인 이유는 야채를 직접 재배하는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천에 진출한 중국인들은 무역업이나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노동자 외에 농사에 종사하는 화농(華農)들이 많았다.

   
 


화농은 1887년 정크선 승무원이 산둥(山東)성 연대에서 채소씨앗을 가져와 현재의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 농사를 지었고 이것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에서의 화농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911년 인천화농들은 농업공의회라는 야채공동판매조직을 만들고, 1920년대 초 인천 야채소비량의 70% 정도를 공급했다. 인천에서 한국인이 채소재배를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부터다.

신포시장은 부평시장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신포동은 개항 후 선창리의 일부 지역에 시가지가 조성돼 1903년 부내면 신설 때 신창동으로 됐다가 광복 직후 1946년 1월 1일부터 신포동으로 개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창이라는 의미는 새로이 번창한 마을이란 의미이고, 신포란 새로운 포구를 의미한다. 신포동의 원래 이름은 ‘터진개’, 그러니까 바다 쪽으로 터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항 당시 신포동은 정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포동에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신포동에서 개항장을 통해 온갖 상품이 들어왔고 그것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신포시장은 어시장과 야채시장으로 출발해 1927년 공설 제1일용품시장과 공설 제2일용품시장으로 됐다가 광복 이후 지금의 재래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신포시장 내에는 중국인이 개설한 푸성귀전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시장 내 쉼터에 놓여 있다.

 # 청과물 시장(채미전 거리)과 중앙도매시장

채미전 거리는 동인천역 앞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경인철도 주변거리로 용동 9번지 앞길에 조성된 청과물 시장을 말한다. 이 도로는 경인철도 개통(1899년) 후 한국인 거주 지역이던 율목동 일원에서 축현역을 왕래하기 위해 만든 거리로 현재 송림동과 숭의동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다.

교통요지인 이곳에서는 숭의동, 도화동에서 재배된 청과물이 모이면서 형성됐고, 개항 초기에는 주로 중국 상인에 의해 운영됐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주변 지역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에서 과일을 출하했다. 1900년 3월 6일 일본인거류민회에서 ‘야채류 그외 식용품 시장 개설에 관한 건’이 허가됐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그 자리는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1927년 이후 ‘인천물산주식회사’가 인천부에서 개설한 공설 청과물시장을 대행하면서 청과물시장은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

   
 
이곳을 채미전 거리라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1910년대 인천외곽지역에서 재배한 과일이 이곳에서 거래됐고 그 중 참외가 가장 많이 거래됐기 때문이다. 참외의 사투리인 ‘채미’에서 유래한 것인데 당시 거래된 참외는 거의 재래종 청참외(일명 개구리 참외)였고 지금의 노란 일본 종 참외와 성환 참외가 선보인 것은 1930년대경이다. 이후 동인천역과 숭의동 간의 도로 확장을 위해 철로변 일대 건축물을 철거하면서 시장이 축소됐고 일부 상인들은 송림동 동부시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청과시장 인근에는 채소를 경매하던 중앙도매시장이 있었으나 이 시장은 1997년 구월동 농축산물시장으로 이전하며, 채소시장이 사라진 후 채미전 거리의 청과물 시장도 쇠퇴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중앙시장과 배다리시장
 
중앙시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1935년을 전후해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모양의 시장이 개설되고 중앙시장 인근 개천가에 야시장이 운영된 것이 중앙시장의 출발이다. 광복 후 이주민을 중심

   
 
으로 송현일용품시장이 있었던 자리에 ‘제물포상인보존회’를 설립했으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인천상우공동조합’으로 바뀌어 주식회사를 설립하다가 무산됐다. 6·25전쟁 이후 인천의 중앙시장 역할을 하다가 한복과 침구류·교복 등이 특화됐지만 인근의 인구 감소, 주변의 지하상가와 노후된 건물, 편의시설 부족 등이 문제로 현재는 쇠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배다리 시장은 6·25전쟁 이후 인근 주민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옷가지와 양은솥, 과일 등을 내다팔며 시작해 1959년 배다리 야시장이 정식으로 개설되자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은 거의 소멸된 상태로 그릇도매상가와 송현자유시장이 대신하고 있다.

시장의 소멸은 신도심의 팽창과 새로운 유통기관의 발달로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재래시장은 정과 덤이라는 인간이 냄새를 느끼는 유일한 곳이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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