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천 녹청자 도요지
종 목 사적 제211호
지 정 일 1970.06.08
소 재 지 인천 서구 검암동 산438-21
시 대 고려시대
인천 검안동 일대에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5∼6기의 고려 가마터 이다.
가마터 주위 지세는 얕은 비탈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발굴조사시 드러난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지만, 나머지 일대는 골프장으로 변해있다. 발굴 당시 가마 1기를 조사하여 많은 녹청자조각과 가마도구들을 발견하였다. 가마는 자연 경사를 이용한 것으로 칸이 없는 통가마이다. 3차례에 걸쳐 다시 고쳤쌓았는데, 경사도 20°도 안팎의 가마바닥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경사진 넓적한 자기로 만든 도지미를 깔고 그릇을 구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에서 구운 것은 녹청색의 짙은 청자로 유약은 녹청색·녹갈색으로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문양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 병의 몸통에 주름무늬가 보인다. 토기의 형태는 대접, 접시, 병류가 많다.
이러한 녹청색의 청자가마터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녹청자는 토기에서 변화 발전한 청자발생 이전의 것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초기 청자의 영향을 받아 지방수요용으로 대량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안동 가마터의 연대는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말발굽 모양의 자기로 만든 베개(도지미)와 유사한 것으로, 중국 북방 청자가마터에서 사용된 것이고, 녹청자가 녹갈색이나 암록색을 띠는 것도 중국 북방의 청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두 지역간의 영향관계도 앞으로 연구해 볼 문제이다.
2.답동성당
종 목 사적 제287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인천 중구 답동 3-1
시 대 일제강점기
신부 홍요셉이 세운 벽돌 구조의 성당이다. 1897년에 세웠으며, 1937년에는 성당은 그대로 두고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두차례에 걸친 내부공사가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나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우리나라 교회건물의 보편적 형식이다.
3.인천도호부 청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남구 관교동 146-1
시 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청은 원래 15∼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출장 나온 관리들이 임시로 머무는 숙소인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로 수령들이 공적인 일을 하던 동헌 및 훨씬 후대에 세운 창고만이 남아있다.
객사는 지붕기와에서 발견된 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년(1677)에 고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현재의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기 때문에 지을 당시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객사는 원래 20칸의 규모였다고 하나 현재는 중앙부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있다.
4.부평도호부 청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943
시 대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하나로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현재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이나 현감의 살림채였던 내아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연못인데, 긴 돌을 이용해 단을 쌓고 네모 형태로 만들어 조선시대 연못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평도호부 청사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청사규모로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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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논현포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남동구 논현동 415-56
시 대 조선시대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의 배를 막기 위해 쌓은 포대이다.
조선 고종 16년(1879)에 쌓은 것으로 화도진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인천연안은 강화의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포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논현포대만 남아있다.
원래 대포자리가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2개의 대포자리가 남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인천 일본 제일은행지점
종 목 인천광역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중구 중앙동1가 9
시 대 구한말
고종 광무 3년(1899)에 지은 석조건물이다.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한 건물로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현관은 반원의 곡선형으로 중앙에 만들었는데 그 위로 르네상스풍의 작은 돔을 올려서 좌우대칭으로 꾸몄다. 바깥벽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지붕의 꼭대기 부분인 용마루에는 장식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앙 돔의 양옆에 있는 작은 탑은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본떠서 단순화한 건물이다.
7.인천우체국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2.03.02
소 재 지 인천 중구 항동6가 1
시 대 일제강점기
1924년 일제시대에 지은 건물로,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단순화한 것이다. 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둥머리 없는 작은 기둥을 여러개 받쳤다. 윗부분에는 둥근 돔 모양의 탑옥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에서는 생략하였다. 당시 관공서 건물은 대체로 탑옥을 올린 모양이었는데 이 건물은 기본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되어 지붕을 보수하였다.
8.인천향교
종 목 인천광역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남구 관교동 117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인천향교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하였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명륜당·삼문 등을 고쳤다.
현재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뒤쪽에는 제사공간을 이루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9.부평향교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982-1
시 대 조선시대
고려 인종 5년(1127)에 계양산 아래에 지은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동무·내삼문 등이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향교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으로, 다른 향교에 비해 간소한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10.용궁사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중구 운남동 667
시 대 조선시대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명칭인 용궁사로 바뀌게 되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용황각·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용궁사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씨(주련)가 4개 남아있다. 내부에는 본래 옥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는 맞배지붕집이며, 건물 앞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1.인천문화원(구제물포구락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중구 송학동 17
시 대 구한말
인천에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인 제물포 구락부의 사교장으로 쓰기 위해 광무 5년(1901)에 지은 것이다.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 소속의 정방각으로 불리다가, 1943년 일본부인회관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이후로도 정치 변화에 따라 여러 용도로 쓰였는데, 1990년부터는 인천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 벽돌집으로 근대 개항 이후 복잡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호화스러운 건물이다.
12.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동구 창영동 42-3
시 대 구한말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用)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시설하였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13.중구요식업조합(구 인천일본58은행인천지점)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지 정 일 1993.07.06
소 재 지 인천 중구 중앙동2가 19-1
시 대 일제강점기
일본 오오사까에 본점을 둔 제58은행의 인천지점이다. 후에 여러 은행들과 합쳐져 야스다 은행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조흥은행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 새로 건물을 짓고 옮겨가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에서 사용하고 있다.
2층에는 보기 드문 발코니와 지붕창이 특징이며 지붕이 2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 프랑스 분위기를 자아내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14.심즙 신도비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95.11.14
소 재 지 인천 서구 공촌동 산8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심즙(1569∼1644)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심즙은 28세 때인 선조 30년(1597)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맡아보았다. 특히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처소를 옮길 때에 왕을 모시고 따라간 공이 인정되어 공신에 오르기도 하였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써서 유척기가 비에 새기었다.
공의 묘는 원래 시흥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때 비도 함께 옮겨 보존하고 있다.
15.팔미도 등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2002.02.04
소 재 지 인천 중구 무의동 산375
시 대 구한말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서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894년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다.
16.홍예문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지 정 일 2002.12.23
소 재 지 인천 중구 송학동 2가 20
시 대 조선시대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일본이 자국의 조계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조성한 축조물이다. 현재 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인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의 일본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17.문학산성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6.12.18
소 재 지 인천 남구 문학동 산27-1외 2필
인천광역시 남구 문학산 정상부분에 있는 돌로 만든 산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동사강목』과『여지도서』에 의하면 문학산은 백제 미추왕의 도읍지로 돌로 만든 산성의 터가 있고, 성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싸며 성벽을 두른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내성이 100m, 외성이 200m로, 성 안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어 그 모습을 모두 볼 수는 없다.
18.화도진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동구 화수동 138
시 대 조선시대
진은 진영을 줄여 부르는 말로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이다. 화도진은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화도진의 설치는 인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비하여,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만들도록 하여, 1879년 완성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에 따른 군대 관리제도 개혁으로, 진이 철폐되고 건물도 철거되었다.
화도진은 1882년 5월과 6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영·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1982년 화도진을 그린 『화도진도』를 보고 옛 건물을 복원하였다.
19.능허대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
지 정 일 1990.11.09
소 재 지 인천 연수구 옥련동 194-54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 동진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이다.
당시 백제의 정치 상황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던 백제 사신들은 고구려를 거쳐가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이곳 능허대를 통해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뱃길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가 개발되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가 있다.
20.계양산성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지 정 일 1992.05.15
소 재 지 인천 계양구 계산동 일원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계양산 동쪽 능선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고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보문헌비고』, 『관방성곽조』에 의하면 성둘레가 1937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이다.
21.삼랑성
종 목 사적 제130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시 대 삼국시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22.고려궁지
종 목 사적 제133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시 대 고려시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23.참성단
종 목 사적 제136호
지 정 일 1964.07.1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4.초지진
종 목 사적 제225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시 대 조선시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25.덕진진
종 목 사적 제226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26.광성보
종 목 사적 제227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시 대 조선시대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27.강화산성
종 목 사적 제132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시 대 고려시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28.갑곶돈
종 목 사적 제306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외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29.강화외성
종 목 사적 제452호
지 정 일 2003.10.25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강화도)
시 대 고려시대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30.택지돈대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강화군)
지 정 일 1995.11.14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강화 53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모양으로 쌓아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 위로 낮게 쌓은 담의 일부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1998년에 완전 복원해 놓았다.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었다.
31.삼암돈대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 (강화군)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1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32.분오리돈대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 (강화군)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185-1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띠었다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이 동원하여 쌓았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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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보유자 : 박상준(1978.2.23 인정)
부평구 산곡동
궁시장(弓矢匠)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일컫는 말인데, 박상준 옹은 특히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에 속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헌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 궁시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로부터 사용된 활과 화살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화살의 종류로는 크게 목전(木箭), 철전(鐵箭), 예전(禮箭), 편전(片箭), 유엽전(柳葉箭)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무게와 용도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제작에 사용되는 주요 재료로는 싸리나무와 대나무, 철, 심줄, 새의 깃, 도피, 아교 등이 있다.
범패와 작법무(나비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나호
보유자 : 박치훈(일초) (2002.2.4 인정)
부평구 부평동
나비춤은 부처님의 정법을 상징하는 무용으로 일명 해탈무(解脫舞)라 하며 인천의 나나니춤과 어우러져 민속무(民俗舞)에도 영향을 준 춤으로 승속(乘俗)이 하나되어 예수렁이 한층 승화된 춤이다. 이는 자비(慈悲) 발견 및 참는 마음의 발견, 법보(法寶)의 발견을 위하여 추는 춤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법열(法悅)에 도달하기 위하여 향화게(香花偈), 운심게(運心偈), 삼적의(三的依), 오공양(五供養) 등과 같은 범패(梵唄)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호적(胡笛), 징 등의 반주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연주하는 수도 이다.
자수장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보유자 : 김계순(2003.10.27 인정)
부평구 산곡3동
김계순은 우리나라 현대 자수계의 1세대이자 원로로써 오늘날 우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을 하였으며, 자신의 영달보다는 후학 양성과 자수연구에 전력해 왔다. 특히 대체로 궁중에서 성행하고 여인들의 규방에서 행하여 진 관계로 문헌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옛날 작품을 분석 연구하여 도안과 작품 재현에 헌신하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부평도호부 청사 (富平都護府 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1982.3.2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내)
고려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부평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雄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아(동헌이라는 견해도 있음)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형 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어사대 (御史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1990.11.9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 내)
어사대는 욕은지 동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큰 돌로 대를 만들고 중앙에 『어사대 광서정해 중수 (御史臺 光緖丁亥 重修)』라고 새긴 돌이 놓여 있다. 이 곳도 인근의 욕은지와 같이 정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지금의 융릉 : 사도세자 의 능)을 전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하여 수원 행궁(임금이 거동할 때 묵었던 별궁)에 들를때마다 활쏘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곳 어사대 후문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고종 24년 (1887) 중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욕은지 (浴恩池)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1982.3.2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 내)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욕은지는 장대석을 쌓아 가로 18cm, 세로 16cm 규모로 축조한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내에는 돌로 쌓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각종 초화를 심었으며 석교가 놓여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인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지만 인조는 부평에 거동한 적이 없어 실제로는 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 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하였다. 특히 21년(1789)에는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하였다. 이 때 정조는 부평에 주정(晝停 : 낮에 머뭄)하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 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부평향교 (富平鄕校)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1990.11.9 지정)
계양구 계산동 982-1
고려 인종 5년(1127)에 건립된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37)때 불탄 것을 숙종 14년(1688)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문헌(경기읍지 중 부평읍지)에 의하면 당초 부평향교에는 일반적인 향교 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건축양식은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는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1906년 보통학교령이 공포되어 교육기능을 마감하고 성현에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오늘에 이어져오고 있다
출처 : 내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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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보유자 : 박상준(1978.2.23 인정)
부평구 산곡동
궁시장(弓矢匠)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일컫는 말인데, 박상준 옹은 특히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에 속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헌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 궁시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로부터 사용된 활과 화살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화살의 종류로는 크게 목전(木箭), 철전(鐵箭), 예전(禮箭), 편전(片箭), 유엽전(柳葉箭)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무게와 용도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제작에 사용되는 주요 재료로는 싸리나무와 대나무, 철, 심줄, 새의 깃, 도피, 아교 등이 있다.
범패와 작법무(나비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나호
보유자 : 박치훈(일초) (2002.2.4 인정)
부평구 부평동
나비춤은 부처님의 정법을 상징하는 무용으로 일명 해탈무(解脫舞)라 하며 인천의 나나니춤과 어우러져 민속무(民俗舞)에도 영향을 준 춤으로 승속(乘俗)이 하나되어 예수렁이 한층 승화된 춤이다. 이는 자비(慈悲) 발견 및 참는 마음의 발견, 법보(法寶)의 발견을 위하여 추는 춤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법열(法悅)에 도달하기 위하여 향화게(香花偈), 운심게(運心偈), 삼적의(三的依), 오공양(五供養) 등과 같은 범패(梵唄)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호적(胡笛), 징 등의 반주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연주하는 수도 이다.
자수장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보유자 : 김계순(2003.10.27 인정)
부평구 산곡3동
김계순은 우리나라 현대 자수계의 1세대이자 원로로써 오늘날 우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을 하였으며, 자신의 영달보다는 후학 양성과 자수연구에 전력해 왔다. 특히 대체로 궁중에서 성행하고 여인들의 규방에서 행하여 진 관계로 문헌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옛날 작품을 분석 연구하여 도안과 작품 재현에 헌신하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부평도호부 청사 (富平都護府 廳舍)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1982.3.2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내)
고려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부평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雄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아(동헌이라는 견해도 있음)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형 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어사대 (御史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1990.11.9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 내)
어사대는 욕은지 동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큰 돌로 대를 만들고 중앙에 『어사대 광서정해 중수 (御史臺 光緖丁亥 重修)』라고 새긴 돌이 놓여 있다. 이 곳도 인근의 욕은지와 같이 정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지금의 융릉 : 사도세자 의 능)을 전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하여 수원 행궁(임금이 거동할 때 묵었던 별궁)에 들를때마다 활쏘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곳 어사대 후문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고종 24년 (1887) 중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욕은지 (浴恩池)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1982.3.2 지정)
계양구 계산동 943 (부평초등학교 내)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욕은지는 장대석을 쌓아 가로 18cm, 세로 16cm 규모로 축조한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내에는 돌로 쌓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각종 초화를 심었으며 석교가 놓여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인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지만 인조는 부평에 거동한 적이 없어 실제로는 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 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하였다. 특히 21년(1789)에는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하였다. 이 때 정조는 부평에 주정(晝停 : 낮에 머뭄)하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 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부평향교 (富平鄕校)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1990.11.9 지정)
계양구 계산동 982-1
고려 인종 5년(1127)에 건립된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37)때 불탄 것을 숙종 14년(1688)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문헌(경기읍지 중 부평읍지)에 의하면 당초 부평향교에는 일반적인 향교 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건축양식은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는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1906년 보통학교령이 공포되어 교육기능을 마감하고 성현에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오늘에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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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1월 14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신도(神道)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를 뜻하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자에 한해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이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집(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심집의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공조·예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심집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인천시 서구 공촌동으로 이장하였으며, 이때 신도비도 함께 옮겼다.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비대(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 0.85m, 두께 0.53m이다.
좋은정보되시고 채택좀;;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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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천의 문화재...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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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천녹청자도요지
2.답동성당
3.부평도호부청사
4.논현포대
등등이 있습니다^^
많이 못써서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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