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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옥 할머니(75)가 배 부리던 이야기

재누리 2013. 3. 9. 09:05

“대인호에 일곱명씩 태우고
무인도로 굴 따러 다녔지”

윤순옥 할머니(75)가 배 부리던 이야기

내가 만석동에 온게 큰아들이 7살때니까 아마 51년전일게야.

1.4후퇴때 고향 황해도 벽송군 송해면 대소읍에서 연평으로 피난 나와 2년있다가 여기 들어왔으니까.
일제시대 때 정신대로 갈 처녀들 공출한다고 하는 바람에 일찍 시집을 갔는데, 친정이 원

래부터 중선을 부리던 집이었지. 결혼해서도 고향에 있을 때부터 한아바이(남편)가 배를 부렸어.
맨 처음 만석동에 와서는 남들은 가서 그냥 석탄도 퍼오고 밀배(밀 수송선)도 타고 하는데 나는 그런걸 할 줄 몰랐어. 한아바이가 여기 오자마자 영종에 돌짐 지러 가고는 아이들하고 내가 뭐 할 일이 있었나 먹고살아야 하는데 말야.

그래서 큰아들 데리고 만석동 뻘에 나가 고철을 주워서는 씻어서 팔고 그랬지.
그러다 갯마당에서 조개를 잡아다가 하인천에 가져 나가서 팔고 겨울에는 굴도 까고 그러고 살았어.

한아바이가 돌아와서는 얼마 있다 작은배를 하나 사서 배타고 다니니까 삐쭉이도 잡아다 팔고 그랬지.

거 배로 잡는 큰 조개 있잖아 그걸 삐쭉이라고 그래.
그러고 한 4년 있다가 그 배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거 누가 가져간 게지.

할 수 없이 빚을 얻어 배를 하나 지었네. 그때부터 배이름이 '대인호'였지.

그래 그 배를 가지고는 굴을 따러 다닌 게야. 저 충청도 울섬, 모래섬, 대섬 이런데로.
만석동에 온지 한 5년쯤 되었을 땐가, 그렇게 굴 따러 다닐 때 이런 일도 있었다네.

예전에 동네에 배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나중에 배들이 좀 모이면서 같이 다니고 그랬거든.
그때도 배 네 척이 모여서는 대섬으로 굴을 따러 갔지.

그때는 빨갱이들이 많을 때라 대섬에도 빨갱이들이 있다고 해서는 밤에 거기서 자면 안된다고 나라에서 그랬지. 그래 밤이 되면 잠은 다른 섬으로 가서 자고 해야했어.
그런데 같이 간 배에 일이 생겨서 그섬에서 밤을 나게 생겼는데 밤에 불을 켜거나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같이 간 배 하나가 불을 몇 번 켰다 껐다 했나봐.

그래서는 그 한밤중에 군부대에서 다들 출동하고 비행기가 뜨고 경비정이 몰려오고 탕탕거리며 난리가 난게야. 그래 죄다 군부대에 잡혀가서 조사 받고 나오고 그런 일도 있었다네.
그렇게 섬으로 돌아다니며 굴을 해가지고는 한배가 차면 돌아오고 했는데,

한 여섯 일곱명씩 태우고는 다녔어. 돈 내고 굴 밭을 사서하는 데는 갈 수가 없으니까 돈 안내고 다니는 무인도를 찾아다니고 한게야.
나중에는 물때 맞춰서 물때가 길면 아래 대부도가서 하고 물때가 짧으면 영종도가서 하고 했지.
새벽 5시면 집을 나와서는 배를 타고 나갔는데 굴을 한배 채우고 돌아오면 6시가 될 때도 있고, 물때가 안 맞으면 9시가 넘어서 돌아오기도 했어. 내가 그때 한 6년을 그러고 살았네.
그때 애들이 넷이었는데, 그냥 집에다 놔두고 다녔지. 넷째 낳고는 젖이 불어도 먹이지도 못하고 짜 내버리면서 다녔다네.
그래도 큰아이가 있으니까 애들 놔두고 가면 집에 먹을거리를 좀 해놓고는 다 자는 아이들 머리 맡에 쪽지를 하나 써놓고 이거이거 해먹으라 일러 놓고 나가는거지.
저녁때 배 대고 집에 들어와 보면은 난리도 아니었지.

아이들이 댓 살씩 먹었을 때는 뭐 꺼내 먹는다고 그릇이 깨져있고 말이야.
추울 때도 집에 난로고 불이고 다 꺼놓고 나가야 했는데, 위험하니까 난로를 못 피워놓고 다니겠더라고.

그래 아이들이 추우니까 이불 다 펴놓고 뒤집어쓰고 그러면서 지냈어.

집에 와서는 잠자는 아이들 깨워 밥 못먹었으면 먹여 재우고 그러며 살았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첫째는 어려서부터 한아바이 따라다니며 배를 타더니 지금도 배를 타고,

둘째는 하와이로 이민 가서도 배를 부리고 사는구먼.

지금까지 배 6척을 만들어 타고 다녔는데 그배 이름이 다 '대인호'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