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여든 하나인데 칠십까지는 굴까고 살았어. 피난 나와서 연평도에 한 2년 있다가 만석동에 들어왔는데 여기가(만석동 9번지) 다
땅막이었지. 영감이랑 어린 아들 둘하고 내려왔는데 먹고사는 게 큰 일이었지. 영감이 여기다가 대충 땅막을 짓고는 노동일하러 부두로 다니고 나는 그때부터 갯일하러 다녔어.
고향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뭐 할 일이 있어야지. 주변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을 보니 다들 갯일을 하더라고.
배타고 영종도 대부도에 나가서 굴, 바지락을 따다가 까서 파는거야.
내 고향이 황해도 동강면인데 고향에 살 때는 내가 굴 까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지.
전쟁 나서 여태 고생하고 산거야.(지금 혼자 사시는 할머니는 근력이 딸려 10년전부터는 굴 대신 마늘을 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뇨와 백내장으로 그마저 할 수 없습니다.)
물때를 맞춰 괭이부리에 여자들이 모이면 영종까지 데려다 주는 배가 있었어. 배가 뭐 크기나 했나. 그래도 한 50명씩 타고 갈 수 있었어.
배가 들어오면 서로 먼저 타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난리였어. 지금은 우리들 굴 따던 데가 다 메워졌는데,
옛날에는 갯벌에 굴 따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바글바글했어.
지금이야 갯벌도 다 주인들이 있어서 굴 따면 뭐라고들 하지만 그때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막 가서 따는 거야.
겨울에는 굴 따러 다니고 여름에는 조개 캐러 다녔어. 바지락도 얼마나 많았는데. 그때만 해도 물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몰라.
지금은 영종도에 뭐(인천 국제공항) 짓는다고 오염이 되어서 굴이 있어도 예전처럼 싱싱하고 영글은 건 없을 게야.
그때는 굴이 얼마나 좋았는데, 알도 크고 지금 나오는 굴이 어디 굴이야 돌맹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가지고는 뻘도 많고 까기도 힘들고... 예전처럼 물도 깨끗하고 내 눈만 멀쩡하다면 지금이라도 가서 굴 한 포대 따오겠구먼.
배 뜨는 시간에 맞춰 아침이면 매일 부두에 가는 거야. 자루 몇 개를 가지고 말야.
배가 물살이 센 데를 못 지나가서, 빙 돌아갔는데 영종까지 두 시간 걸렸어.
그 시간 동안에도 놀 수가 있나. 가면서 전날 따 논 굴을 가져가 까고 올 때도 그날 딴 굴을 까면서 왔어.
영종도에 내리면 저녁까지 하루 종일 갯가에서 굴을 따는 거지. 바다가 얼마나 파랬는데. 지금은 많이 더러워졌지.
쭈그리고 앉아서 굴따다 보면은 추워도 시간가는줄 몰라.
그때 작은애는 어려서 집에 놓을 수 있나 아무도 없는데, 등에 업고 다녔어. 애 업고 따다가 애가 자면 갯가에 뉘어 놓고 따고 그러면서 살았어.
애도 어려서부터 바닷바람을 하도 맞아서 그런지 자라면서 별 병 없이 컸어. 그때야 하루 일 나가 하루 먹고살았으니 애고 어른이고 아프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여기 와서 셋째를 낳았는데 애 낳고 다음날 바로 애 업고 굴 따러 다니고 그랬어. 에구 징그러워,
그전에 피난 나온 사람들 고생 안한 사람이 어디 있어.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냥 갯벌에 가는 거야. 여기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았어.
갯벌에서 일 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싸온 도시락을 사람들하고 나눠 먹었어. 싸 오는 게 별거 없어도 서로 자기 것도 먹어 보라고 그러면서 살았지.
하루종일 굴을 따면 하루에 한사람이 3포대 정도를 따는데, 많이 해오는 날은 7포대까지 따온 적도 있었어. 그렇게 딴 굴 포대에 각자 이름을 적어서는 배에 실어 오는 거야.
그리고 집에 와서는 밤새도록 굴을 까는 거야. 배에서 까고 집에서 까고 그러면서, 그때 노는 게 어디 있어 놀 수도 없었지.
지금 화수시장 가는 길에 대장간이 하나 있었어. 거기서 굴 까는 칼이랑 갈고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얼마나 잘 만들어 주었는지 몰라. 그걸로 굴 따고 까고 그랬어.
영감이 일찍 죽고는 내내 그렇게 해서 자식들 키우고 학교 보내고 그러면서 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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