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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 부산항에 / 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재누리 2017. 3. 7. 06:02






미소라 히바리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천재 가수, 가요계 여왕, 국민가수 등 미소라 히바리(みそらひばり)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재일교포의 민족적 차별 속에서도 자신이 한국계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활동한 미소라 히바리는 한국의 패티 김과 이미자를 합쳐놓은 것 같은 호소력 짙은 가창력으로

1,70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수많은 히트곡을 남겨 음반 판매량만도 4,000만 장이 넘는 일본 최고의 인기가수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한 깊은 충격과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일본인들 사이에 혜성처럼 나타나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주옥 같은 노래로

일본의 경제부흥기에 한몫을 단단히 한 까닭인지

일본 정부는 그녀에게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국민영예상’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즉 우리에게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고국인 한국과 고향에 대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 선조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갸륵한 각오가 깊었다.

가난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일본국에 까지 와서

노동으로 생업을 삼은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대신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한국을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고,

아버지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

 아버지의 나라에서 딸이 “돌아와요 부산항”을 열창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꿈은 생전에 이루어 질 수가 없었다.

왜? 일부 한국인들이 일제(日帝) 때, 고통의 과거사를 생각하여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까지 혐오(嫌惡)의 대상으로 간주,

한국 방문을 봉쇄한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이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한국 가수들에게 문화교류의 대문을 열었다.

일본 열도에서 한국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 등이 유행하는 것이다..


끝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고향과 선조의 산소를 찾지 못하고,

 52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노래로써는 일본국 제일의 가수로 등극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恨)과 슬픔과 고독속에 산 가수라 할 수 있다.

 

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1960년에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자녀의 출산을 하지 못했다.

이혼 한 후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속세의 남녀의 정을 잊고,

독신으로 오직 노래와 결혼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혼자 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이버지의 나라를 찾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자신을 못오게 막는 한국정부를 원망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1987년 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다.

 

쇼와 천황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11일에는 그녀는 생애 최고의 인기곡

《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 흐르는 강물처럼)》을 발표했다.

그 곡은 일본국 NHK 방송국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9년 6월 13일에 결국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1989년 7월 4일, 일본정부는 일본 여성 최초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하고,

그녀의 공적을 회고하고 기렸다.




 

일본 후쿠시마 현 이와카 시에

설치된 미소라히바리 유영비


1989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일본국 각 방송사에서 전국에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하고 애도의 분향과 꽃다발을 바쳤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의

노래 합창속에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요코하마 시 고난 구(港南区)에 안장되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너무 일찍 갔지만,

 그녀의 기념관에는 그녀의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노래가 영원히 울려 퍼질 것 같다.

 

[자료정리 : 쉘부르 2016.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