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닷물이 송림동 로터리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반대켠으로는 숭의동 독갑다리까지였다.
그러니 속칭 전도관 언덕 즉 쇠뿔고개는 인천의 지맥을 버텨주는 허리였던 셈이다. 개화기 이곳을 서양인들이 주목했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은 그곳에 별장을 짓고 이어 감리교의 존스 선교사는 선교기지로 삼았다.
지금의 영화학교와 창영교회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사숙소가 소재한 언저리이다.
그들이 교외지역을 택한 이유는 이미 항만 일대가 외국인의 상사 주거지 등으로 땅값이 앙등한데다 경인선이 개통되는 등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요 발전의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당시 모습은 황량하기 이를데 없다. 50년대 언론인 고일이 대낮에도 강도가 출몰할 만큼 호젓한 곳이었다고 기록을 남겼거니와 잔솔밭 언덕에 홀로 양관 한채가 서있다.
이곳이 전도관 자리요 그 이전에는 개미학원이라고 했었다. 1927년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계명학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계명이 개미로 와음되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의 대학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는데 50년대를 지나면서 박태선 장로교에서 매입, 전도관을 건립했다. 계명이란 이름은 한 고아원의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이곳에 별장을 세운 알렌은 원래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리고 별장은 감리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도 우연찮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02년 목포로 향하던 선편에 승선했다가 해난사고로 순교한 주인공인데 인천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묵었던 것이다. 알렌은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1885년) 그들 부부는 우리집의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국땅에서 마지막 머무른 곳이 또 제물포에 있는 우리집이었다는 것은 신기한 우연의 일치이다.”
이처럼 숭의동과 창영동 언덕은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31일 기공을 하게 되는 기독교선교역사관의 위치로는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는 개인적 아쉬움이다.
낙후지역이라고 방치하면 더욱 낙후되고 개발지역에 치중하다 보면 더욱 혼잡을 가중한다.
그러니 속칭 전도관 언덕 즉 쇠뿔고개는 인천의 지맥을 버텨주는 허리였던 셈이다. 개화기 이곳을 서양인들이 주목했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은 그곳에 별장을 짓고 이어 감리교의 존스 선교사는 선교기지로 삼았다.
지금의 영화학교와 창영교회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사숙소가 소재한 언저리이다.
그들이 교외지역을 택한 이유는 이미 항만 일대가 외국인의 상사 주거지 등으로 땅값이 앙등한데다 경인선이 개통되는 등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요 발전의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당시 모습은 황량하기 이를데 없다. 50년대 언론인 고일이 대낮에도 강도가 출몰할 만큼 호젓한 곳이었다고 기록을 남겼거니와 잔솔밭 언덕에 홀로 양관 한채가 서있다.
이곳이 전도관 자리요 그 이전에는 개미학원이라고 했었다. 1927년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계명학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계명이 개미로 와음되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의 대학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는데 50년대를 지나면서 박태선 장로교에서 매입, 전도관을 건립했다. 계명이란 이름은 한 고아원의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이곳에 별장을 세운 알렌은 원래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리고 별장은 감리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도 우연찮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02년 목포로 향하던 선편에 승선했다가 해난사고로 순교한 주인공인데 인천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묵었던 것이다. 알렌은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1885년) 그들 부부는 우리집의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국땅에서 마지막 머무른 곳이 또 제물포에 있는 우리집이었다는 것은 신기한 우연의 일치이다.”
이처럼 숭의동과 창영동 언덕은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31일 기공을 하게 되는 기독교선교역사관의 위치로는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는 개인적 아쉬움이다.
낙후지역이라고 방치하면 더욱 낙후되고 개발지역에 치중하다 보면 더욱 혼잡을 가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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